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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만추 Apr 17. 2020

식물 기르는 사람(下)

초록 손가락

내가 만든 인물 또한 내 인생을 닮아가는 것일까. 태수는 그 어떤 작품에도 등장하지 못하고 서랍에 처박히게 되었다. ‘너라도 열심히 식물을 키워 보라’ 던 당부는 의미 없는 외침이 되어 노트북 화면과 자판 사이사이를 맴돌 뿐이었다. 내가 입으로만 식물 기르기를 향유하는 것처럼, 식물을 기르는 남자 태수 또한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인물 프로필에만 머물게 됐다.      


태수의 이야기야 만들고자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태수와 갈등하는 인물도 만들어 놨었고, 그들의 전사를 담은 시놉시스까지 작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시놉시스에 물을 주고 약간만 가꾸기만 하면, 얼마 가지 않아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반려 나무 사이트에서 구입 버튼을 누를까 말까 머뭇거리던 그때처럼, 태수의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걸 머뭇거리고 있었다.      


처음은 그냥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다. 코미디 단막을 한 번 써봤으니, 다른 장르의 단막을 써보고 싶었다. 선생님과 문우들에게 ‘저는 이런 꽃도 피울 줄 알아요’라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대학 내 군기 문화라는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태수는 다음으로 밀려났다. 태수에게 미안하게도 당시 쓰던 희곡은 코미디로 마무리되었지만.      


이번엔 태수 이야기를 써야지. 해를 넘기고 서랍 속에 넣어놨던 시놉시스를 펼쳐 들었다. 시놉시스를 조금 읽다가 얼굴을 쥐어 싸고, 태수 이야기를 다시 서랍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번엔 태수의 적대자 숙희가 문제였다. 태수와 숙희를 처음 만들었을 당시엔 가부장 문화와 남성문화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그 이후, 페미니즘을 만나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나의 눈에 숙희는 더 이상 예전의 숙희가 아니었다.      


숙희는 남성문화에서 조롱하던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숙희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지만, 이제는 안다. 태수의 이야기가 만들어낸 열매는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맹독을 가진 열매일 테다. 태수의 이야기가 피워내는 꽃은 심한 악취를 풍기는 꽃일 것이다. 그런 식물을 기를 수는 없었다. 여성 혐오를 재생산하는 인물이 아닌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 새로운 태수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재작년. 드디어 새로운 태수의 이야기를 만들 때가 왔다. 청년 문제를 다룬 희곡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태수가 이 이야기와 잘 맞을 것 같았다. 매일매일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았던 태수, 야근에 시달리다 과로로 쓰러져 자발적 백수가 된 태수. 현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태수와 비슷한 경험 하나씩은 있잖아? 나는 태수를 희곡 속으로 불러들였다.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태수는 여전히 식물을 기르는 남자였다. 부모님 몰래 회사를 그만두고 식물을 기르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으며, 자신이 기른 고구마나 상추를 지인들에게 나눠주며 행복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퇴사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에게, 애지중지하던 방울토마토 나무가 뿌리째 뽑히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그리고 더 비극적인 결말은 이 이야기는 대본 수정을 거치며 전체가 삭제되었다.      


태수는 새로운 이야기 속 주인공과 많은 부분이 닮아있었다. 자발적 백수라는 점이나, 부모님에게 퇴사 사실을 숨긴다는 점 등. 작가로서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태수가 정말 이 이야기에서 필요해? 한 명으로도 충분한 이야기를 둘이서 나눠 갖고 있지는 않아? 새로운 잎으로 더 많은 영양분을 보내기 위해 노랗게 변한 하엽을 정리하듯, 희곡 속에서 불필요한 태수의 이야기를 톡 떼어냈다.      


죽어가는 화초를 살려내는 사람, 식물 기르는 데에 재능을 가진 사람을 초록 손가락이라 부른다고 한다. 내가 초록 손가락을 가진 작가였다면 진작 태수의 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었을 텐데. 식물을 기르는 것도, 식물 기르는 남자 태수의 이야기도 몇 년째 상상에서 그치는 내가 믿을 거라곤 <어쿠스틱 라이프> 작가의 말 뿐이다. ‘어설프지만 로망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다 보면 어떤 로망은 은근슬쩍 현실이 되어 있기도 하다.’ 식물을 기르고 싶다는 나의 로망도, 식물을 기르는 남자 태수의 이야기도 언젠가 은근슬쩍 현실이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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