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식물, 식물에 대해
겨울. 우리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2020년을 준비하며 우리는 함께 글을 쓰기로 했고. 4월에는 식물에 대해 글을 쓰기로 했다. '식물'이라는 주제에 나는 신이 났다. 좋아하는 식물도, 식물에 대한 에피소드도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심 4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4월이 되고 첫 주
나는 태티서의 글을 보고 노만추의 글을 읽고 나의 몬스테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주
태디서가 야채 부족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노만추의 인물 텃밭을 훔쳐봤고 나의 라일락 나무 이야기를 내어 놓았다.
이제 '식물'의 마지막 주.
태티서는 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 나도 사람을 꽃에 비유하는 게 불편하다. 주로 그 대상이 성적 매력이 만개한 여성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하지만, 그래, 꽃이 꼭 로맨틱한, 섹슈얼한 이미지를 담고 있을 필요는 없다. 사랑과 고백을 목적으로 꽃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내게는 만날 때마다 꽃 선물을 하는 언니가 있었다. 처음엔 이상했다. 여자에게 꽃 선물을 받다니. 그 언니는 이성애자였고 나와 크게 친하지도 않았지만 만날 때마다 가벼운 꽃다발을 선물하곤 했었다. 언니는 '본인이 꽃을 좋아하기 때문에 선물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주 꽃을 사고, 건네는 행위가 언니에겐 취미였던 것일까? 그 꽃을 받아 돌아오는 길에는 '내일이 기대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조금 시든 이 꽃이 물을 머금고 싱싱해질 내일이 기대됐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꽃이 시들어 버리는 날까지 언니와의 만남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시든 꽃을 버리고 나면, 언니는 다시 나를 만나 꽃을 선물하곤 했다. 꽃은 예쁘고 시들고 늘 다시 피어났고, 그 꽃으로 시작된 기억은 내 속에 꼭꼭 남았다. 그런 의미에서 태티서는 팬지꽃 혹은 제비꽃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은 꽃들은 야무진 구석이 있다. 꽃말이 태티서랑 어울려서 인 것 같기도 하고.
노만추는 식물을 키우듯 인물을 키우고 있었다. 아니 가꾸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나에게서 나온 씨앗을 인물로 심어서 길러내고 돌보아, 튼튼한 극 중 인물로 가꾸고 있었다. 노만추의 작품 속 인물들이 떠올랐다. 그 인물 하나하나가 그렇게 만들어졌겠지. 새삼 노만추가 다정한 사람 같다. 정이 많은 사람은 열정적이니까.
20대 초반의 나는 지나치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어른이 되어 만난 세상이 너무 좋아서 온갖 생명체에 정을 주었고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열정적으로 대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좀 지쳐있었다. 내가 지쳤다는 것을 알게 된 후, 1년 정도 나만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내 의지는 아니었다. 기력이 없어서 나 이외의 것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친구들은 그런 나를 '우울한 상태'라고 정의 내렸다. 나는 열정과 우울 사이를 조율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나는 중심을 잡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의 기본값을 유지하는 연습. 때문에 열정적이고 싶은 순간에 애써 자제하는 경우가 많다. 혹시 내 '정'이 넘쳐 과열된 '열정'이 되어버리면 그 후의 나를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서 말이다. 나의 글 쓰기에도 그런 비겁함(?)이 드러나곤 한다. "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 맞아. 내가 만든 인물들은 조금씩 그런 비겁함을 갖고 있다. 식물이라는 주제로 글을 쓴 노만추는 나를 반성하게 한다.
나는 몬스테라를 기르는 이야기를 했다. 라일락 나무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나는 식물을 '자라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었다. 이 '자라는 것'이 지금의 내가 스스로에게 투영하고 있는 이미지였다. 식물이라는 주제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았지만 결국엔 다 푸르구나- 무럭무럭- 싱그럽게- 초록초록- "자란다"가 하고 싶은 말이었던 것이다. 30대가 되어 시작된 나의 새로운 도전들에 나는 자라고 있다. 그리고 이 '담'은 <담다디>는 나를 가장 건강하게 키우고 있다. 태티서, 노만추 덕분에 더욱.
4월이 지나가고 있다. 꽃들은 떨어졌고 잎이 자라날 시간이다. 건강하고 풍성하게 자라야지. 모든 것들이.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