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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티서 Apr 08. 2020

야채부족증

4월 창작 주제 <반려식물>

 “그래, 야채를 먹어야 잘 사는 거지.”     


 예전에 노만추가 연극 <우리는 이 도시에 함께 도착했다.>를 추천했었다. 나는 무언가 ‘신청’하는 분야에 한해선 행동을 미뤄두는 탓에 결국 관람의 기회를 놓쳤다. 이 소식을 전하자, 노만추는 친절하게도 이 연극의 원작 소설 링크까지 보내줬다. 201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인 강화길 작가님의 <방>이 바로 그 원작이었다. 소설은 초반부터 흡입력이 있었다. 그러다 위에 옮긴 저 문장을 만났고, 나름의 까다로운 취향을 사수하려는 마음의 벽이 그 순간 완전히 허물어졌다. 저 문장이 좀 내 마음 같았던 것이다.      


 야채를 먹어야 잘 사는 거지. 이 문장에 담긴 입장을 좀 더 세세히 따져 보자면 이렇다. 세상엔 잘 사는 상태와 못 사는 상태가 분명 존재한다. 나 역시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내 생각에 잘 사는 건 예컨대 이런 것이다. 모처럼 일본 여행을 가서 유니버셜 스튜디오에도 갔다가, 다리를 쉴 겸 카페에 앉아 말차 파르페도 먹었다가 하는 것. 못 사는 것은, 같은 일본 여행을 가더라도 염가 패키지에 포함된 전망대에만 올라갔다가, 다시 다른 전망대에 올라갔다 하는 것이다. 심지어 기념 촬영도 추가 요금이 발생하니 절대 찍혀서는 안 되며, 혹시 찍혔더라도 아는 체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문장을 말한 극중의 화자는 녹색 야채를 먹는 것을 잘 사는 삶의 최소 기준으로 삼고 있다. 최소 기준이라 이해한 것이 확대 해석은 아닐 것이다. 조세희님의 <난·쏘·공>에도 나왔듯이 ‘오직 지옥에 사는 사람들만이 천국의 생활을 궁금해 할’ 테니까. 내 생각엔, 이미 잘 사는 삶의 기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시점에서 화자가 잘 사는 삶의 경계 밖에 있음이 증명되는 것 같다. 실제로 소설 속의 화자는 최소한의 생활비로 생계를 어렵게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룸메는 건강 문제까지 생겨 말 그대로 몸이 석화되기까지 했다. 잠시 말이 샜는데,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나 역시 그녀(화자)의 기준에 완전 동의한다는 것이다.       

 

 내 삶이 구제할 길 없이 초라하다고 느낄 때 종종 내 식단엔 풀떼기라곤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혹은, 유난히 진짜 야채를 적게 먹는다고 느낄 때 갑자기 스스로가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나의 ‘야채부족증’은 언제나 우울한 감정을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야채부족증’을 심하게 앓았던 시기는 크게 두 번 있었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한 뒤 오랜 백수생활을 하면서도 이 증상을 겪었다. 그땐 버는 돈이 없었고, 적게나마 비축해둔 돈을 최대한 잘게 쪼개 쓰는 것이 익숙해졌던 때였다. 분명 적응됐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완전히 괜찮은 상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잠깐만, 나 점심에도 컵라면 먹었는데. 그러고 보니 아침은 건너뛰었고, 어제 저녁에도 컵라면을 먹었잖아?’ 한 번 온 현타는 쉽게 가시질 않았다. 난 이제 스스로에게 단일메뉴 고문을 가하지 않으면 더는 살아갈 길이 없을 정도로 경제적인 운신의 폭이 좁아진 것일까? 같은 예산 안에서 밥을 더 잘 챙겨먹을 수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과업처럼 느껴졌다. 내가 부자였다면 이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아마 집사가 알아서 영양 만점 리코타 치즈 샐러드를 차려 내왔을 거란 말이다!     


 다른 한 번은 군 제대 이후 은근하게 찾아왔다. 모처럼 사과를 먹는데, 사과가 너무 셨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이상하다, 나 분명 과일 진짜 좋아했는데? 군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 신 거 킬러였는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이 모든 것이 다 군대 때문이라는 결론이 났다. 이놈의 군대가 내 체질을 바꿔 논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군대는 1년 6개월 넘는 기간 동안 개인차라곤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식단을 먹도록 강요해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무슨 젠더에 관한 고정관념인진 모르겠지만 식단은 항상 단백질인 척 하는 가공식품이 주를 이뤘었다. 군대가 푸릇푸릇한 과일을 오물오물 씹기 좋아하던 소년 태티서를 오염시켰던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내 망상이었음을 인정하는 글이니, 혹시 군관계자가 이 글을 보더라도 잡아가지는 마시라. 아무튼 내 망상은 대게의 망상이 그렇듯 비이성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야채부족증’은 경제적인 원인으로 생기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경우엔 단체 생활이나 맨 박스에 대한 반감 때문에 생겼던 것 같기도 했다. 뭉뚱그려 보면 대게 내 생활이 내 마음먹은 대로 잘 안 풀릴 때 그런 우울함을 느꼈다. 실상은, 내가 어쩌면 야채를 즐겨먹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야채를 선호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만약 그만큼 선호했다면 생활이 아무리 안 풀리는 와중이었더라도 일단 야채의 자리는 마련해 뒀을 테니까.      


 나는 이제 내 병(?)의 증상을 알고 있다. 강화길님의 소설을 보고 이 증상을 앓는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갑자기 내 앞에 녹색 채소들이 나란히 자라난 탄탄대로가 펼쳐지지 않는 이상에야 나의 결핍감이 단박에 해소될 일은 물론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왕 먹는 야채를 긴 생각 없이 기쁘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는 스스로의 멘탈을 잡고 살았으면 좋겠다. 부끄럽지만 최근에도 회사 일이 마음먹은 대로 안 풀려 마트에서 쌈채를 사먹었다. 좀 우걱우걱 먹었는데 정말 맛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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