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틈 사이

과거와 현재, 그 틈 사이에 서서

by 하날빛



조그마한 여자 아이

어느 문 앞에 서 있다.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문 틈 사이, 한쪽 눈을 찡긋 감고는 뜬 눈을 틈 사이에 대고 이리저리 초점을 열심히도 맞추는 중이다.



불이 다 꺼진 컴컴한 6인의 병실.

6명 제 각각의 절망과 고통, 또 다른 한편의 의지로 뒤범벅이 되어 쾌쾌해진 냄새가 문 틈 사이로 흘러나온다.


코 끝을 찌르는 불쾌함에도 한 치의 미동도 없는 작은 아이는,

무엇을 그리도 보려 하는 것일까.


아이의 시선이 마침내 머문 곳은, 한 구석의 침대이다.

모든 불이 꺼진 시간, 유독 한 침대에서만 형광등의 하얀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느 새벽

갑자기 찾아온 오른쪽 손발 마비로 황급히 응급실로 옮겨졌던 일흔넷의 노인이 누워있는 침대.


한 달이 넘도록 씻지 못한 흔적이 얼굴에서부터 발 끝까지 뒤덮인 채 잠들지 못하게 하는 밤을 이겨내려는 듯, 고단한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다. 노인의 병명은 뇌졸중이라는 것이었으나 실제 지금 그가 싸워오고 있는 것은 밤마다 찾아 오는 알 수 없는 복통과 짐작해 보건대,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함이었다.


침대의 모든 사람들이 잠드는 시간이 되면, 이곳에서는 한 노인의 밀려오는 통증과 그 근원지를 찾아낼 수 없어 더욱 커져버린 두려움과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악...악.. 으어억...허어억.."


한 달이 넘도록, 밤새 들려오는 고통 소리.

집중해서 보려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가늘어졌다가 굵어졌다가를 반복하는 신음 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울리는 듯 느껴진다.


아마도 그에게는 배 속이 찢어지는 것 같다는 그 견딜 수 없이 아픈 고통을, 신음에 기대어 견뎌보려는 처절한 발버둥이리라.



노인의 발치 아래에는 한 여인이 있다. 간이용 침대에 쪼그려 누워있는. 고통을 대신해 줄 수 없는 괴로움과 두 눈을 꼭 감고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도 찾지 못한 한 여인.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올린다.

삼키고 삼킨다, 또 한 번, 열 번째 눈물을 삼킨다.

그녀에게는 뱉어낼 수 없는 울음을, 어둠에 기대어 견뎌보려는 발버둥이다.



버튼 하나면 위. 아래로 움직일 수 있는 전동 침대 위에서는, 스스로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큰 힘을 들여야 하는 한 노인의 탄식 소리가.


그 아래 좌우로 편하게 몸을 돌리는 것도 버거운 비좁은 간이용 침대에서는, 차마 터뜨리지 못하는 눈물을 목 뒤로 넘기고 있는 한 여인의 침묵 섞인 울음소리가 어느 한 공간을 뒤덮고 있었다.








'어디선가 봤던 거야..'



한쪽의 뜬 눈으로 문 틈 사이를 보고 있던 작은 아이는, 한쪽 눈마저도 감아버린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막기 위해 두 눈을 꼭 감는 것 외에는 작은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검어진 시야 안에서는 점점 더 선명하게 커지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채, 검은 어둠 속에 울음을 쏟아내고 있는 앳된 자신의 모습.


이불속의 숨 막히는 공기. 꺽꺽대며 숨차도록 차오르는 숨과 멈춰지질 않는 눈물이 범벅되어, 점점 더 뜨거운 기운으로 채워지는 어둑 축축한 기운이 점점 더 또렷해진다.




문 틈 사이, 검은 공간을 타고 귓가에 들여오던 한 노인의 신음 소리는 어느샌가 뚜벅뚜벅 복도 끝에서부터 들려오는 휘청거리는 발걸음 소리로 바뀌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오는 불균형한 비틀거림이 무섭도록 느껴지는 걸음.



오늘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어젯밤에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냥 이 밤으로 끝이 났으면..






발소리는 아이의 집 문 앞에서야 멈춰진다.



끼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귀를 틀어막고 듣고 싶지 않은, 걸음만큼이나 휘청거리는 목소리가 따라 들어온다. 하루 중 아이가 들어보는 아빠의 유일한 목소리이다. 술 기운이라는 것이 빠져있는 아빠의 멀쩡한 목소리는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비틀거리는 그 소리가 집 안으로 스며들면 곧이어 시작되는 건 늘 같은 기류였다. 숨이 막힐 듯하게 덮쳐오는.


잠시 흐르는 정적을 깨듯, 날카롭게 맞부딪히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문 틈을 타고 들어온다.



낮고 빠르다가 점점 높아지고 거칠어지다가..

가늘어졌다가 굵어졌다가를 반복하며

벽의 모든 틈을 부서뜨릴 것만 같은 밤의 소란이 시작되었다.


작은 두 손바닥이 뜨거워질 듯이 귀를 막아봐도 어느 틈으로 들어오는 것인지 찢어질 듯한 고함과 몹쓸 언어들은 진동과 함께 더 선명히 파고들어 오는 것이었다.


숨소리 하나에도 소란이 더 크게 번질까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둠을 찾아 숨어드는 것뿐이었다.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지만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할 수 있는, 어둠 속으로.



아이는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삼키고 삼킨다, 또 한 번. 열 번째쯤 되는 눈물을 삼키고 나면 검은 문 틈 사이로 새하얀 빛이 들어온다.


밤이 끝났다고 알리는 아침의 신호가.


그쯤이 되어야 밤사이 내내 짓눌렀던 공포 막을 내린다.


왜 어김없이 아침은 밝아오는 건지.

아직 삼키어야 할 울음이 남아있건만. 어둠 속에 파묻어 놓아야 할 슬픈 것들을 아직 숨기어놓지 못했건만.

아름다운 빛을 품고는 왜 이리 화창하게도 밝아오는 건지.


오늘 밤은 또 얼마나 더 검은빛을 내려고..


내일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이 끝이었으면..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오늘 밤이 끝이었으면 좋겠다.



이불속에 숨어 들어간 아이, 몸을 웅크린 만큼 작은 아이가 된 그 여인은 고통에 저절로 내뱉어지는 아빠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제 멋대로 움직일 수 조차 없는 몸을 대신해 소리라도 내어보는 그 투쟁의 몸부림을 들으며.


심장을 쿵쾅 쳐대는 듯 그토록 무서웠던 아이의 밤들은, 슬프도록 진한 연민에 휩싸인 여인의 밤들이 되어 돌아왔다.


비틀거리며 걸어왔던 그 걸음 소리가, 차라리 그리운.



나의 평생을 이렇게 울음으로 물들여버린 것에 대해 차라리 죽을 듯이 미운 마음이라도 들면 좋으련만.

내 평생 발목을 붙잡는다며 차라리 끊어내 버릴 듯한 원망이라도 되었으면 좋으련만.


남은 것이라고는 살과 근육이 다 빠져버려 헐렁해진 노인의 피부 가죽만큼이나 너덜너덜해진 그녀의 연민과 사랑이라 부르는 그것뿐이다. 애통하게도.



기억조차 싶지 않아 지워져 버린 검은 기억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란, 그런 것이었던 거다.


아빠에 대한 연민.

사랑.


살리고 싶은, 간절함.





해지고 조각조각난 마음의 끝에서조차, 기어코 손을 뻗게 만드는 감정이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마음의 끝에서도 사랑이라는 것은, 아주 작은 틈이라도 기어이 들어온다.



외면하고 싶다. 그건 내 것의 마음일리가 없다고 부정하고 싶다.이제는 내 갈 길을 가며 그늘진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산산조각 나 있는 어린 시절 기억의 아주 작은 틈으로 기어이 들어고야 마는 것이다.


어두움의 절정인 밤 한가운데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쉼이 주어진다는 역설만큼이나.

극도의 검은 명암이 드리운 자리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감정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이 우리를 고통 속에서도 살게 하는가를 생각한다면..


그 틈 사이로 들어온,

끝끝내 살아남은 사랑이 아닐까.


지난 세월에 켜켜이 쌓인 아픔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당신에 대한 사랑.


사랑.



- 병실의 검은 문 틈 사이로 우리를 바라보던, 어린 날의 나에게. 그리고 매일을 비틀거렸던, 젊은 날의 나의 아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