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의 미학
여름의,
유일한 구원
살면서 이 질문을 받지 않아본 사람이 있을까.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빠짐없이 받아봤을 법한.
그것도, 잊을만하면 종종.
묻는 상대만 달리하여, 꽤나 자주 받았을 질문.
그 상대가 누구든 나 역시, 일 년에 한 두번쯤은 답해봤을 물음이기도 하다.
'내가 왜 좋아하냐면~'
뒤에 반드시 따라붙는, 그 계절만이 가진 나를 사로잡는 이유와 낭만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으면서.
기억하기로 나의 대답은 한 번도 바뀌어본 적이 없고 한결같았는데, 선택은 항상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그 순간의 계절이었다.
지금 그 한복판을 지나 끝물로 향하고 있는 '여름'이라는 철은, 나의 애호 리스트에 단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달갑지 않은 계절에 속하면 속했지, 호(好) 와는 거리가 먼 계절.
몸의 온도가 조금이라도 올라갈라치면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모든 기력을 잃는 나에게, 여름이란 매해를 겪어도 어쩐지 익숙해지지 않는 계절이었다.
'언제나 이 뜨거움이 가라앉을까'
달력을 보며, 거센 기운이 한 풀 꺾이는 날을 헤아리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지는, 그런 계절.
그러나, 이 계절에도 찾아보자면 낭만이 있으니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철에만 만날 수 있는 '과일'이다.
수박, 포도, 복숭아, 자두, 참외, ..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게 '봄의 것인지, 여름의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것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저 과일들은 딱,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날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식탁에 올려지는 것들이었다.
여기에 내가 자라는 동안 맛보지 못한 과일 몇 개도 더해지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무화과, 체리 등도 여름이면 등장하는 류에 포함이 되었다.
딱 이 한 철에만 그 모습을 드러내며 '순간'을 뽐내는 이 과일들,
그렇기에 이것들은 나에게.
그 나오는 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기도 하고.. 점점 그 맛을 잃어가는 끝물엔 그 마음이 못내 아쉬움이기까지 하는, 계절이 가져다주는 '낭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을. 겨울 다른 계절에도 그럼, '그 철만의 과일이 낭만이냐'를 생각해 봤을 땐..
글쎄, 다른 계절엔 그것 말고도 눈과 귀,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여름을 견딜 수 없어하는 나'이나, 아이러니하게도 좋아하는 과일은 대부분 여름에 몰려있다.
이것에서라도 여름을 살아낼 이유를 찾아낸 것일까. 여름을 견디는 나를 붙들어줄 유일한, 구원으로서.
뽀오얗고 보드라운 솜털로 덮인 복숭아.
새빨간 빛의 자태를 뽐내는 체리.
진한 자줏빛으로 익어가는 신비로운 무화과.
강렬하게 내리쬐는 뜨거움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면서도, 나는 이 과일들을 원 없이 먹을 수 있다는 행복함에 빠지고는 한다.
여름의 유일한 구원처럼.
때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사실인지!
여느 여름과 다름없이, 접시 안에 한가득 복숭아며 무화과를 담아 놓고는 한 입 한 입 그 맛을 음미한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잠시, 집었던 무화과를 내려놓는다.
무화과가 추운 계절의 과일이었더라면.
복숭아가 겨울에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더라면.
그게 아니더라도, 여름에도 있고 겨울에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과일이 된다라면.
절로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진다.
'여름이어야만 한다'
아삭하게 베어먹는 하얀 털복숭아는 여름이어야만 어울리는 것이다.
입에 닿자마자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무화과 역시, 뜨거운 햇빛을 흠뻑 받고 난 후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오물거려야 제맛인 법이다.
여름에도 먹고 겨울에도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매력이 없다.
흔하게 되어버린 것을, 여름이라는 계절에만 간절히 찾게 될 리 없다.
가을이 찾아올 즈음이면 시들어가는 색깔에 아쉬움이 있을 리 없다.
아무런 인위성도 없는, 제 철의 햇살과 비와 바람을 맞으며 자라온 것과 그 한 계절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가.
사계절, 각자의 때마다.
모든 것들이 가장 좋은 순간에, 가장 알맞은 빛깔과 맛을 완성한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롭기까지한 일인지.
각자가 충만한 때를 가졌다는 것은.
각자의 때.
누군가는 조금 더 이른 계절에.
또 누군가는 조금 더디 오는 것 같은 계절에.
중요한 것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제철이 있다는 사실이다.
여름철의 달콤한 무화과와 겨울철의 새콤한 귤을 놓고 '그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느냐'며 비교할 수는 없는 것처럼.
무화과를 다시 한 입 베어 먹으며 생각한다.
그러니 먼저 맺힌 열매를 부러워할 일도, 나는 열매가 없다며 스스로를 초라히 여기며 조급해할 일도 아니라는걸.
그 열매는 열매대로, 내 열매는 열매대로 각자의 때가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는걸.
이리저리 둘러보며 비교하지 않아도 나와 우리. 각자의 삶은, 가장 아름다운 '나의 제철'에 이르러 있으리라는걸.
나의 때에 피어오르는 충만함이란, 얼마나 찬란할 것일지.
그것을 기대해보게 되는 것이다.
* [하날빛의 글 정원]
글로 이끈 삶을, 글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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