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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남이 Feb 25. 2021

삼일절에 만난 하남의 독립운동가들

서울시와 인접한 하남시는 예로부터 정치·사회적 사안들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져왔다.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던 3·1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을 넘어 경기권 독립운동의 거대한 파고를 일으킨 하남시의 만세운동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남 지역의 남다른 민족정신을 만나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심에는 수도 서울, 그리고 바로 인접해 있는 경기도가 있다. 일제가 조선의 침략과 지배를 위해 다수의 기관을 서울에 설치했던 시절, 경기 지역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의 거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과 인접해 있는 덕분에 식민제도의 부당함과 억울함, 분노가 보다 빠르게 전달되면서 독립운동, 항일운동의 당위성을 그 어느 지역보다 빠르게 절감했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웠던 경기도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914년 2월 대한독립의군부가 편제를 구성할 때 서울, 강화, 개성, 수원, 광주에 5영을 설치한 배경만 봐도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가 갖는 위상과 무게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하남 지역 사람들 역시 대한민국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맹활약을 펼쳐왔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유생들이 일으킨 을미의병의 경우 하남 지역 의병들은 남한산성을 군사적 요충지로 삼아 활동했다. 1908년 광주군 동부면에서 의병들이 체포되거나, 일본인이나 한국 순사 등과 맞붙어 싸운 기록들이 남아 있을 정도로 끈질기게 항전한 정신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3·1운동 당시는 어땠을까? 경기도의 3·1운동은 3월 초를 시작으로 4월 초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경기도 21개 모든 부와 군에서 17만 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가 300회 가까이 발생했다. 이렇게 치열하게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원인은 서울의 움직임과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또 지방 사회의 지식인, 청년, 유생층의 선도적인 역할과 농민 대중의 적극적인 참여 역시 경기도의 만세운동에 불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3월 초순에 기소된 인물의 66%가 지식인, 청년, 학생이었고 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한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 사이에는 기소된 인원의 90%가 농민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농민들은 평화적 시위에서 면사무소, 군청, 경찰관서 등 일제 침략 기관을 습격하고 파괴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투쟁하고 시위를 벌였다.


3·1운동, 그 뜨거웠던 하남의 함성


하남지역의 만세운동 상황을 살펴보자. 1919년 3월 21일에서 31일 사이 광주에서는 11회에 걸쳐 7600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4월 1일에서 15일 사이에는 400명이 참가한 시위가 한 차례 벌어졌다. 동부면 만세운동 상황을 살펴보면 교산리의 구장이었던 이대헌은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3월 26일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2시, 동네 주민 십수 명과 함께 마을 야산에서 봉화를 밝히며 1시간 동안 횃불 시위를 전개했다. 새벽 3시경 산에서 내려와 만세운동 시위대와 함께 면사무소로 가 30분가량 독립 만세를 외친 후 해산한 그는 오전 11시경 다시 30여 명을 모아 오후 2시까지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9월 13일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월 27일 아침 망월리 구장 김교영은 사환을 시켜 마을주민을 불러모아 10여 명의 주민과 함께 동부면사무소로 가서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일로 그는 6월 2일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199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월 26일 오후 10시 풍산리 농민 김홍렬은 마을 주민 20여 명을 모아, 함께 산으로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27일 오후가 되면서 구천면 주민들이 합세함으로써 연합시위로 확대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대헌, 김교영, 김홍렬 등 14명이 체포되었다. 같은 날 구천면 길리 및 동부면사무소 앞에서는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외쳤고 동부면과 서부면의 산 위와 남한산에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또 상일리에서도 천여 명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헌병주재소로 밀려가 헌병을 포위하고 돌을 던지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는데, 이 과정에서 일제 헌병의 총격으로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했다. 중부면에서는 주민 300여 명이 만세운동을 하는 도중 중부면장이 몽둥이에 머리를 맞아 인사불성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3월 28일 오포면과 경안면의 시위에서는 15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청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군수를 압박했고 헌병 보조원의 무기를 빼앗으며 돌을 던져 우편국의 유리창을 깨뜨렸다. 이들은 일제 헌병의 발포로 5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했다. 


잊지 말아야 할 우리 선조의 독립운동 정신 


광주군에서의 만세운동 역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천도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 세력과 학생이 참여한 이 시위들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경기도 24개 지역 가운데서 광주군이 집회 횟수로는 5번째, 참가 인원 수로는 6번째에 해당한다고 할 만큼 규모가 크고 횟수가 많았다. 광주군 내 만세 시위가 집중적으로 전개된 1919년 3월 26일에서 28일까지의 상황을 살펴보면 3월 27일 오포면에서는 1500명의 농민들이 참여해 6명이 죽고, 10명이 다쳤다. 지금의 하남시에 해당하는 동부면에서는 27일 300여 명의 주민이 면사무소를 습격했고 같은 날 서부면에서도 1000명이 면사무소를 덮쳤다.


서부면의 만세운동은 감일리 구희서가 주도했다. 27일 새벽 마을 야산 횃불 시위로 시작해 주민 40여 명이 서부면 사무소와 상일리 헌병주재소로 행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가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이 면사무소와 헌병대에 돌을 던지며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하자 헌병들이 발포하여 사망자 1명과 부상자 2명이 발생했다. 5월 6일 구희서는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구희서나 이대헌의 재판 과정 진술에 따르면 서울에서 3·1운동에 직접 참여한 인물들과 천도교 교단의 활동이나 학생을 비롯한 외부인을 통해 3·1운동 발발 소식을 듣고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3월 27일 동부면과 서부면에서 동시에 추진되었던 만세운동은 태극기를 미리 준비하고 횃불 시위를 전개하는 등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부면과 서부면, 구천면의 주민들이 참여하면서 규모가 큰 연합 시위 형태로 발전하기도 했다. 서부면 시위 과정에서 일제 헌병의 발포로 사망자가 나오면서 만세운동을 격화·확산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남 지역의 독립 만세운동은 당시 광주군 3·1독립만세운동의 출발지점으로 이후 만세운동이 타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면서 나라 전체를 독립 의지로 달구는 뜨거운 마중물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없었다면 결코 누리지 못했을 2021년 대한민국의 자유.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은 이들의 위대한 민족정신을 잊지 않고 더 부강한 나라를 위해 전진하려는 의지가 아닐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남의 독립운동가 1919년

그날의 기록


이대헌


3월 26일 태극기를 만들며 만세운동 준비

3월 27일 새벽 2시 동네 주민과 마을 야산에서 횃불 시위 전개

3월 27일 새벽 3시 만세운동 시위대와 면사무소에서 독립 만세를 외침

3월 27일 오전 11시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헌병에 체포

9월 13일 징역 2년형 선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김홍렬


3월 26일 산으로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 주도

3월 27일 구천면 주민 합세하며 연합 시위로 확대.

이 과정에서 이대헌·김교영·김홍렬 등 14명 체포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김교영


3월 27일 동부면사무소 앞에서 만세 시위 주도

6월 2일 징역 1년 6개월형 선고

1994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구희서


3월 27일 서부면사무소 앞에서 새벽 마을 야산 횃불 시위

5월 6일 징역 8개월형 선고

1992년 대통령표창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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