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논리를 지닌 고압적인 남성의 이야기를 읽었다. 자신에 차 있던 태도. 논리 정연한 말과 화려한 업적. 누구나 인정할 법한 그의 언행에 깃든 기묘함을 봤다.
그의 사고는 명료했다. 아니, 단순했다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는 쉽게 누군가를 판별했고, 상황을 가늠했다. 대개 그의 통찰은 통했으나 당연하게도 언제나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확고부동한 신념은 비극을 낳았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데 이상하게도 기시감이 들었다. 어딘가 찝찝한 낯익음이었다. 감정의 연원을 거스른 끝에 문득, 그에게서 지금의 '나'를 보았음을 깨닫는다.
근래 양극단의 사이, 긴 스펙트럼으로 이어진, 여러 색이 혼합된 곳에 해당하는 진리,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어졌다고 느낀다. 반면, 예전에 비해 사람을 보는 눈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몇몇 행동과 눈빛만으로도 그, 혹은 그녀의 속내가 보였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인지할 수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오만했던 것이다. 그깟 경험 몇 번 했다고. 조금 아는 게 늘었다고. 그 조막만 한 앎에 지독히도 광활한 진리를 내친 것이다.
이미 안다는 생각에서 마주한 것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이분법적인 사고로 어떻게 이해를 확장할 수 있을까. 대체 언제부터 나는 이토록 자만하며 살아왔던 것인가.
부끄러움 많은 삶에, 겸손함만큼은 그나마 내세울 수 있다고 믿었건만 그마저도 나의 오만에 불과했다.
어디서부터 다시 쌓아 올려야 할지. 아니, 어디서부터 다시 무너뜨려야 할지 고민하다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우선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부터 다시 보자고. 사물이든, 사람이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기에.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부터 돌이켜보자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를 좋아하는 것인지, 내가 바라는, 가상 속의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인지, 헤어짐이 오기 전에는 깨닫기 어려운 탓이다. 그러나 사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 노력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불가능함을 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의 세상에서, '내가 바라보는' 상대를 볼 수밖에 없는 탓이다.
때문에 좋아하는 누군가의 좋은 점을, 가능한 많이 발견해내려 한다. 조막난 특성들을 모으고 모아, 상대를 향한 애정이 그의 한 조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한 뼘의 특성으로, 한 덩어리의 성질로, 그리하여 그 자체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상대를 긍정하는 과정에서 내가 사랑한 그의 특성을 상기하며, 동시에 그 자체를 존중할 수 있도록.
우선, 오랜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의 좁은 인간관계에 속한 사람들은 사실, 대부분은 오래된 사람들이다. 회의적인 데다 비관적인 사람이라, 누군가를 믿는 데 퍽 오래 걸리는 탓이다. 먼저 이야기할 친구는 그중에서도 근래에 자주 만나는 아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때이다. 같은 반이었나. 어렴풋한 잔상과 함께 남은 단체사진 한 장. 초등학생 때의 기억은 그뿐이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중학생 때다. 우리 학교는 수학과 영어에 대해 수준별 수업을 진행했는데 각각 세 반으로 나누어졌다. 그녀와 나는 같은 영어반에 배정되었다. 다시 만난 그녀는 꽤 차분한 인상이었다. -사실 초등학교 때 만난 적 있다는 기억도 떠올리지 못했긴 하지만. 수업에 크게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약간은 신경질적이었던 것도 같다.
솔직히 말해, 교실에서 만난 그녀는 나와 성향이 달라 보였고, 자연스럽게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와 친해지게 된 계기는 취미였다. 당시에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져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녀가 같은 작품을 좋아한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이후로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쇼핑을 가거나 소박하게 집에 모여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녀는, 그래, 편한 친구였다. 각기 다른 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저녁이나 같이 먹자며 만났다가 쿨하게 헤어질 정도로 친한, 동네친구.
그런 친구의 중요성을 절감한 건 최근 들어서였다.
대학교에 가고, 취업을 하며 제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친구들과 멀어졌다. 여전히 SNS를 통해 연락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만나기는 어려웠고 모처럼 만났다고 하여도 이전과는 달랐다. 멀어진 기간 동안 우리의 관심사는 달라졌고, 너무 다른 일상은 다소 지루하게 들렸다. 거의 함께 살다시피 했던 과거는 어디 갔는지 어색함만이 맴돌 때도 있었다.
새롭게 사귄 사람들은 어려웠다. 이전만큼 마음이 가지 않았고, 무엇보다 피곤함이 설렘과 즐거움을 압도했다. 원래도 내향적인 성격이었다지만 길었던 코로나의 타격이 이토록 컸다. 사회성도 교육되는 것이라, 반복되지 않은 만남은 아주 오랜만에 본 미적분 문제와 같았다.
마음이 곤궁하나, 누군가를 만날 기력이 없을 때,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동네 친구는 새벽공기 같았다. 그 존재를 모르고도 살아갈 수 있으나, 마주하는 순간, 그동안 내가 퍽 답답했음을 알아챌 수 있는, 폐 깊은 곳까지 퍼지는 선선하고, 또 아늑한 그것. 서서히 스며들어 언제고 갑갑함에 헐떡일 때 슬며시 피부를 어루만져주는.
그녀에게 No란 없다. 정말 불가피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대부분의 먹을거리, 갈 곳, 영화, 만나는 날. 어떤 제안에도 YES를 외쳐준다. 별 것 아닌 그 특성이 참 고맙다. 결국 그녀에게는 '무엇을 할지'보다는 '나와 만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니. 특별한 말 없이 상대에게 존중감과 호의를 표하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도 대단한 일인가.
그녀는 SNS를 즐겨했다.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분석하기를 즐겼으며 사소한 감상도 나누었다. 함께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즐겼으며 때때로 관련 행사에 참여했다. 우리는 곧잘 서로의 행사에 함께해 주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떠들곤 했다.
그녀와의 대화는 늘 즐거웠다. 누군가에 대한 뒷이야기, 과도하게 침체된 사회에 대한 이야기, 버거운 삶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왜 좋은지를 나누는 순간. '좋아한다'는 감정은 생각보다 압도적인 것이어서 그녀의 좋음은 나의 좋음이 되곤 했다.
온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 있을까. 그녀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예전에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표현을 문어체로 한다며 놀림 아닌 놀림을 받은 적이 있다. 어릴 적이라 그게 꽤 위축되게 만들었고, 어느 날 그녀와 애니메이션 얘기를 하다 '오글거린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그녀의 말에 대해 반응한 것은 아니고 애니에 대한 소감으로 한 말이었다. 그때 그녀의 반응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그녀는 정색하며 조곤조곤 일렀다.
"나는 그 표현 싫어해. 그 안에 담긴 마음과 열정을 어떻게 오글거린다는 말로 함축하려고 해?"
나름 혼이 난 것인데 이상하게 기뻤다. 당시 날 위축되게 만들었던 표현이 '오글거린다'는 것이었기에, 그녀의 말이, 꼭 그런 어쭙잖은 말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걸 있는 힘껏 좋아하라는 격려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또한 무던한 사람이다. 18살 무렵, 우리 집에 새 식구가 생겼다. 앙증맞은 다리와 날아갈 듯한 귀를 지닌, 조그마한 닥스훈트로, 여름에 태어났다고 하여 하난이라 이름 붙여진 생명이다-네이버 완결웹툰 가담항설의 등장인물에서 따왔다. 하난이가 온 후로도 그녀는 종종 우리 집에 왔는데, 아직 아기강아지였던 하난이는 장난감을 물려다 그녀를 물곤 했다-다른 사람에게는 한 번도 그러 적이 없는데 유독 그녀에게만 그러긴 했다. 그녀를 유독 좋아하는 하난이는 그녀가 쉬는 꼴을 못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새 옷을 더럽히는 등 아주 악랄한 짓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녀는 단 한 번도 불쾌함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녀 또한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는 유경험자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놀라울 정도의 너그러움이다.
그녀는 약속에 엄격하다. 그녀와의 인연이 이미 십 년이 넘었음에도 그녀가 약속을 어긴 적은 거의 없다. 약속에 대한 태도는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다는 신념을 가진 나로서는, 그런 그녀의 특성이 인격적 품성으로 느껴진다. 자신이 내뱉는 말을 지키려는 책임감, 상대의 시간을 앗지 않겠다는 존중감,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는 하나의 가치관.
단 한 번, 그녀가 약속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 없이 오지 않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 정말 심각했다. 혹시 오다가 무슨 일이 났나. 어디가 아픈가. 그녀와 연락되지 않은 몇 십 분이 꼭 수십 시간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그저 피곤함에 알람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었는데 재빠르게 준비를 하고 나온 그녀의 표정이 기억난다. 어려서부터 거두어준 친우의 가문을 역모죄로 고발하고 그 일가족이 숙청된 후 어찌저찌 살아남은 친우를 마주한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웃음이 났다. 상대가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은 늦게 나온 것인데도 그때의 기억은 무척 유쾌한 것으로 남아있다.
그녀는 서툰 사람이다. 누군가의 칭찬에 서툴고, 상대의 감사에 서툴다. 누군가에 고마운 일이 생겼을 때면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곤 한다.
그래서 그녀가 좋다. 그녀가 서툴러서 좋다. 서툶만큼의 겸손과 그만큼의 마음이 어여쁘고, 여전히 방법을 터득해 나가는 과정에 있기에 좋다. 우리가 함께 더 많은 것을 배워나갈 수 있다는 증거이기에.
아아. 오랜만에 그녀가 보고 싶어 진다. 같이 돈가스나 먹으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