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안고 사랑하기로 했다

공포회피형의 애착 트라우마 극복하기

by 하나


"결혼하자."


꽤나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그 말을, 드디어 들었다. 남자친구가 이번 겨울엔 함께 살 집을 알아보고, 내년엔 동거를 시작하자고 했다. 설레고 행복했지만, 동시에 무서워서 숨이 턱 막혔다.


“지금은 달콤하겠지. 네 인생에서 이렇게 널 사랑해 준 사람은 없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시간이 지나 네가 얼마나 한심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면, 질려서 떠나버릴 거야.”
달콤한 사랑을 약속해 놓고,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나를 배신하고 떠났던 예전의 그 사람처럼.


또 다른 생각이 스친다.
“이 사람이 나중에 갑자기 돌변하면 어떡하지? 저 다정한 얼굴 뒤에 다른 얼굴이 숨어 있다면? 첫 남자친구가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하고, 때려도 떠날 수 없었던 그 지옥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어떡하지?”


지금 남자친구가 주는 사랑은 너무나 내가 원하던 사랑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믿을 수가 없다. 이 모든 게 결국 나를 더 깊은 절망으로 끌어내리기 위한 거대한 속임수처럼 느껴진다. 행복을 눈앞에 두고도, 그 뒤에 숨어 있을지 모를 불행을 먼저 계산하게 된다.


가끔은 ‘이건 사랑이 아닌 것 같다’는 마음이 올라온다. 너무 편하고, 너무 쉬워서 이상하다. 사랑이란 건 원래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게 아프고 잡힐 듯 말듯 불안하게 만드는, 그런 게 아니었나? 내가 이렇게 평온한 건, 어쩌면 그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또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은 날 대체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 내 안의 결함과 상처를 다 알고도 이렇게 사랑한다고 하니까, 오히려 더 의심스러워진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진작 도망갔을 텐데…”


아마 이건 내 안의 공포회피형 애착(Fearful-Avoidant Attachment) 때문일 것이다. 버려질지 모른다는 공포(fear of abandonment)와 사랑에 잠식될 것 같은 공포(fear of engulfment) 사이의 혼란. 따뜻한 사랑을 앞에 두고도 ‘이게 맞나?’ 의심하는 마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어온 내게 내리쬐는 이 강렬한 햇살이 따뜻해서 너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강렬함에 내가 타버릴까 두렵다.


여전히 도망치고 싶고, 의심하고 싶고, 미래의 불행을 미리 찾아내 해결하려는 충동이 자꾸 올라온다. 하지만 상대를 테스트하고 밀어내면서도 그가 곁에 머물길 바라는 건, 결국 내가 스스로 짜놓은 비극의 시나리오를 되풀이하는 일일 뿐이다.


어쩌면 나는 이제껏 기적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눈을 뜨면 모든 불안이 사라지고, 완벽한 확신 속에서 사랑을 누리게 되는 그런 기적. 하지만 애착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기적이 아니라, 매일 밤 불안 속에서도 아침이 오면 다시 한번 손을 잡으려는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서 이번엔, 불확실성에 숨이 막혀도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는 길을 선택해보기로 했다. 이 사람이 주는 따뜻함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으려 한다. 시험하지도 않으려 한다. 실패하고 상처받더라도, 이번만큼은 사랑을 걷어차는 대신 사랑에 기대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


어쩌면 이게 내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일지도 모르겠다.

평온한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는 걸,

그리고 내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있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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