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방치하는 나, 실은 나를 지키고 있었다

자기방임(Self-Neglect)은 트라우마 반응으로서 해리적 셧다운이다

by 하나

집에 혼자 있게 되면, 내 안의 어떤 스위치가 '탁'하고 꺼져버리는 경험을 자주 했다.

분명 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몸이 천근만근 움직이지 않았다. 설거지는 싱크대에 쌓여가고, 빨래는 산더미가 되고, 방은 발 디딜 틈 없이 어지러워졌다. 며칠이고 씻지 않는 날도 허다했다. 배고픔조차 느끼지 못해 끼니를 거르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폭식하며 몸을 괴롭혔다.

이 모든 건 ‘게으름’이나 ‘의지박약’이라는 단어로 쉽게 설명되곤 했다. 나조차도 오랫동안 그렇게 믿었다.

‘나는 왜 이렇게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할까?’ 하는 자책감은 나를 더 깊은 무기력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이 모든 '자기방임'이, 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필사적인 '생존 전략'이었다면?

최근 트라우마와 신체감각기반 심리치료에 대해 공부하며, 나는 흩어져 있던 내 삶의 조각들이 맞춰지는 경험을 했다. 모든 현상의 이유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에 멈춰버린 내 몸의 자기보호 시스템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릴 적, 위험 앞에서 싸울 수도(fight), 도망칠 수도(flight) 없었던 무력한 아이. 그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몸과 감각을 꺼버리는 법을 터득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그 기분. 그저 텅 빈 껍데기만 남은 듯한 그 상태. 그 ‘셧다운’이 바로 해리(dissociation)였다. 전문가들은 이걸 다미주신경이론(Polyvagal Theory)에서 말하는, 생존의 마지막 수단인 ‘배측 미주신경(Dorsal Vagal)의 셧다운’ 반응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단절된 몸은 더 이상 소중한 ‘나’가 아니었다. 내 몸인데도 남의 것처럼 낯설고, 어서 빨리 고쳐버려야 할 성가신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몸이 보내는 피로와 통증의 신호를 무시한 채, 한계 너머로 나를 몰아붙이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다 안전한 집에 혼자 남게 되면, 사회생활을 위해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긴장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 내 몸은 과거의 ‘셧다운’ 모드로 자동 복귀했다. 신경계가 생존을 위해 스스로 전원을 내리면, 이성적 사고와 계획을 담당하는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의 기능도 함께 멈춘다.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은 희미하게 떠오르지만, 몸을 움직일 그 어떤 동력도, 계획을 세울 그 어떤 정신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 그러니 ‘의지’를 발휘해 방을 치우고 몸을 씻는 등의 행동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 당연했다.

에너지를 아껴 생존 자체에만 집중하기 위한 극단적인 절전 모드. 그것이 바로 설거지 더미와 쓰레기장 같던 내 방의 진짜 모습이었다. 배고픔조차 잊은 채 스스로를 방치하다가, 폭식이나 자해로 강한 자극을 주며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뒤틀린 생존 확인을 반복했던 것이다.

이제야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내가 ‘자기방임’이라 부르며 괴로워했던 모든 현상은, 사실 이 해리의 연장선이었다.

나는 내 몸을 학대하고 방임했던 게 아니었다. 내 몸이 나를 살리기 위해 ‘해리’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해 스스로를 마비시켜왔던 것이다. 몸은 그저 과거의 경험, 즉 ‘위험할 땐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생존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다. 이 깨달음은 나에게 거대한 해방감을 주었다.

회복이란, 이 얼어붙은 배측 미주신경(Dorsal Vagal) 상태에서 벗어나, 안전함과 연결감을 느끼는 복측 미주신경(Ventral Vagal) 상태로 돌아오는 과정일 것이다. 특별한 노력 없이도 숨이 편안하게 쉬어지고,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상태. 이제는 오랜 방어 상태 속에 웅크리고 있는 나에게, 그리고 내 몸의 작은 신호들에게 다시 귀 기울여주려고 한다.

“그동안 나를 지키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 이제는 안전해.”

내 몸이 이 말을 다시 믿을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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