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 엄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교문 앞에서 정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오늘도 정환이와 함께였다. 정환이도 유아차에서 얌전히 형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우 엄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정우의 하교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갔다.
그러려고 육아휴직을 낸 거니, 당연히 해야 할 일과라 생각했다.
3월 신학기가 지나 2학기가 시작되었고,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10월의 마지막 날.
노란 은행잎으로 학교는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은 더위와 싸웠던 사람들에게 여유를 가져다줬다.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방과 후 바이올린 수업이 있는 날.
4시 50분이면 수업이 끝나서 보통 때 같으면 요한이와 안나, 정우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난을 치며 교문 앞으로 달려와 엄마에게 안기도고 남았을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은 왜인지 5시가 되어도 누구 하나 나오는 아이가 없다.
심지어 10분 전에 교문에 도착해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안젤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 없는데.
방과 후 수업에 데려다줄 때 분명히 요한이 안나와 우연히 만나서 정우와 같이 셋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결석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안젤라는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을 같이 놀리자는 말을 했었다.
정우 엄마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아니, 이상함을 넘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평소와 다른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애써 고개를 저으며 불안한 자신을 달랬다.
하지만 정우 엄마의 예감은 불행히도 맞아떨어졌다.
땅거미가 드리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우가 멀리서 모습을 보였다.
가까이 다가와서 보니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다.
"엄마 안나가 다쳤어. 내가 안나를 이렇게 들었다가 놨는데 넘어졌는데 안나가 아프다고 울었어. 근데 내가 엄마가 하라는 대로 친구가 다쳤으니까 바로 괜찮냐고 물어도 보고 미안하다고도 했는데.."
정우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엄마에게 최대한 상황을 빠르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 뒤를 안젤라와 안나가 오다가 멈추고, 오다가 멈추고를 반복했다.
정우 엄마는 안젤라에게 달려갔다.
안나는 소리 없이 울면서 엉거주춤 오른쪽 팔을 ㄴ모양으로 들고 있었고, 안젤라는 안나의 왼쪽 팔을 부축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삼삼오오 아이들이 안젤라와 안나를 에워싸며 저마다 시청각실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느라 분주했다.
하지만 그 말소리가 안젤라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안젤라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안젤라는 안나가 똑 부러지게, 어떻게 하다가 어디를 다쳤고, 얼마나 아픈지를 말하지 않아 답답했다.
바이올린 강사가 시키는 대로 아이를 5층에서부터 데리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안젤라가 시청각실로 달려간 이유는 강사가 전화를 해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데리러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안나 어머님이시죠? 안나가 갑자기 아프다고 울어서요. 어디가 아픈지 말을 안 하고 울기만 해서 연락드렸어요. 5층 시청각실로 오셔야 할 것 같아요."
걱정스러운 마음이 깔려있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어간, 굉장히 사무적이고 건조한 말투였다.
그 길로 안젤라는 5층 시청각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안나는 엄마가 왔음에도 어디가 아픈지 말하지 못했다. 요한이에게 물어보니 안나가 갑자기 운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정우 엄마는 안젤라에게 물었다.
"119에 신고하셨어요?"
"네, 바이올린 선생님이 신고해서 교문 앞으로 나가라고 해서.... 그런데 어떻게 다친 건지 몰라서 혹시 머리라도 다친 게 아닌가 하고 선생님한테 cctv 좀 봐달라고 했거든요. 이따가 전화 주신다고 했어요"
안나는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아프다고 그 고통을 표정으로 말했다.
"교문까지 못 갈 것 같아요. 제가 다시 전화해서 운동장 안쪽까지 들어와 달라고 할게요."
정우 엄마는 119에 전화를 하여, 학교로 접수된 건에 대해 교문이 아니라 운동장까지 들어와 달라고 요청했다.
전화를 마치고 그제야 안나와 안젤라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구급차만 기다리는 일밖에 할 일이 없다.
정우 엄마는 그사이 눈물을 훔치는 정우에게 시선을 돌려 차갑게 물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평소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 것 같아 동작이 크고 활동적인 정우에게 화가 났다.
친구와 놀 때 다치지 않게 늘 조심하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학교에서 일어난 일은 정우 엄마 손길이 닿을 수 없었나 보다.
"너 어떻게 했다는 거야? 요한이한테 어떻게 했는지 한번 해봐"
정우는 요한이 뒤쪽으로 가서 양쪽 겨드랑이에 팔을 껴고 들었다가 놨다.
겨우 그 정도로 했는데 안나가 이렇게 아파하다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었다. 누구를 붙잡고 정확한 상황 설명을 들어야 할지 난감했다.
구급차가 들어왔다. 구급대원이 안나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고, 안나는 오른쪽 팔을 가리켰다.
정우 엄마는 제발, 별일이 아니기를.
정우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저 잠깐 근육이 놀랐거나, 아니면 팔이 빠져서 응급실에 가서 관절을 맞추면 멀쩡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두 손을 모았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켜고 교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정우 엄마는 안나와 요한이의 바이올린을 챙기고 전화기를 들었다.
애들을 맡기고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정우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빨리 오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뒤에서 누군가 정우 엄마를 불렀다.
"정우 어머님이세요?"
바이올린 강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