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명언을 듣고 놀라울 정도로 나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바뀌었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나는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이 시험은 내가 붙는다.
가장 불안했던 순간마다, 자기 암시를 하듯이 돌려가면서 되뇌었던 말들이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분노, 원망, 우울, 불안감을 말끔하게 씻어내고 새롭게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반년을 방황했지만, 공부한 시간이 결코 중요한 게 아님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해서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내용은 이미 다 아는 것이었지만 나는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했다.
눈을 감고 목차를 그렸고, 그 목차에 있는 내용을 항목화하여 말로 설명했다.
공부 시작 전에 꼭 그 과정을 매일 반복했다.
그리고 다양한 전공 책을 더 추가하여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에 가지를 쳐서 내용을 확장했다.
'전공책의 단권화'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전공 지식에서 모르는 내용이 없도록 촘촘하게 채워 나갔다.
그 결과 하루 만에 나는 수십 권의 책을 머릿속에서 바로 꺼낼 수 있게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필이면 2009년도 국어 임용고시는 시험 전형이 2차에서 3차로 바뀐 해였다.
1차 시험도 한 달 정도 일정이 빨라졌다.
기존에는 1차 서술형, 2차 면접이었지만 2009년부터는 전문성을 명확하게 판단한다는 취지로 1차는 객관식, 2차는 논술형, 3차는 심층 면접과 수업 실연이었다.
1차 시험일이 다가오자, 공부 방법을 바꿨다.
모의고사 문제를 풀면서 출제자의 의도를 생각했다.
이 문제는 어떤 것을 물어보는 것인지 생각하여 책장에서 책을 꺼내듯, 목차를 찾았다.
그리고 조건에 맞게 답을 명확하고 간결하게 썼다.
글씨도 최대한 또박또박 바르게 썼다.
채점하는 분들이 현직교사라고 했는데, 그분들이 보름 정도 합숙을 하면서 오직 채점만 한다고 했을 때
채점자 입장에서, 수험생의 답안이 명확하고 깔끔하지 않다면 오답으로 처리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서였다.
모든 과정을 역지사지로, 출제자나 시험관 입장에서 생각했다.
자주 틀리는 문제가 있어도 짜증을 내거나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진짜 시험 때 틀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지금 이 문제를 틀리게 되어서,
덕분에 더 알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감히 비사대생인 내가 140명 정도 뽑는 인원에서 1등으로 합격할 거라는 주문도 걸었다.
물론 내가 1등 할리는 없었다.
꼴찌로라도 합격하면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었지만 내가 1등으로 합격한다고 말은 그렇게 했다.
말이 주는 힘을 믿기로 했다.
즐기는 자를 이길 자가 없다는 말이 맞았다.
나는 1차에서 근소한 차이로 간신히 합격을 했다.
거의 한 문제 차이로 통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문제로 생사가 오고 가는 무서운 시험임에 틀림없다.
실경쟁률이 40대 1이었는데 내가 붙다니, 진짜 믿어지지가 않았다.
교실 하나에 약 40명의 수험생이 시험을 쳤으니, 그 안에서 내가 선택되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끝까지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2차 시험 준비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했다.
2차는 커트라인보다 아주 높은 점수로 합격을 했기에 1차 점수를 만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3차 시험. 이틀간 진행되던 시험이었는데 3차 시험은 스터디를 구해서 함께 했다.
재수 때 만났던 스터디 언니인 해경언니와 연락이 닿아서 언니도 2차까지 합격을 한 상태였기에 우리는 3차 준비를 같이 하기로 했다.
기간제 교사였던 언니의 도움을 받아 언니가 근무하는 학교 교실에서 면접과 수업 실연 연습을 했고 서로 피드백을 해주었다.
해경언니의 지인인 현직에 계신 선생님도 오셔서 면접관 역할을 해 주셨다.
우리는 서로 경쟁자였지만 한 마음 한 뜻으로 함께했다.
다 같이 최종의 문턱을 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3차 시험날, 제비 뽑기로 면접 순서와 수업 실연 순서를 정했다.
첫날 면접은 3번. 둘째 날 수업 실연은 13번. 모두 오전에 끝날 수 있었다.
이틀간 보았던 시험을 나는 기분 좋게 마칠 수 있었다.
실수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고 완벽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결과는 나와봐야 아는 것.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었다.
최종 합격자 발표날까지 약 3주를 기다려야 했다.
하루하루가 정말이지 피가 마르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너무 안 가서 지하철을 타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생각을 제일 많이 한 것 같다.
시험을 보기 전에는 부정 탈까 봐 절대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막상 모든 주사위가 다 던져지고 나니 불안함이 엄습했다.
하루가 한 달 같았다. 그래도 나는 기다려야 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