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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선생 Aug 16. 2019

[퇴사일기 #3] 10년만 고생하면 나처럼 될 수 있어



 7년도 넘게 시간이 흘렀지만,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은 잘못되었다고 느낀 순간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주 52시간제를 도입한 요즘 같은 세상에도 그런 일이 흔할까 싶지만, 당시 신입이던 내게 6시는 퇴근 시간이 아니었다. 팀장님을 포함한 몇몇 주축(?) 팀원들과 함께 저녁 먹으러 가는 시간이었다. 주에 3-4일은 늘 그랬던 것 같다. 마치 지루하고 빡빡한 정규 수업이 끝나고 부족한 입시 공부를 몰아서 할 수 있는 야자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고3들의 저녁시간처럼. 퇴근할 사람들은 다 퇴근하고 조금은 한산해진 사무실에서 본격적으로 밀린 업무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시간, 저녁 6시.

 힘내서 야근하자는 의미의 격려 섞인 특식 따위는 없다. 마취 주사 역할을 해야 할 테이크 아웃 커피는 어림도 없었다. (내가 가는 회사, 부서, 팀의 법카는 늘 야박했다. 나만 이런 징크스에 시달리는 건지? 아님 내가 늘 문제였던 건지) 아무튼 그날 역시 언제나 그랬듯, 같은 회사 건물에 위치한 구내식당에서 식판을 집어들고 무심히 밥과 반찬을 퍼 나르던 순간이었다.

 “ㅇㅇ님, 오늘 야근 1시간만 하고 퇴근하신다면서.... 집에 가서 형수님이랑 같이 저녁 드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은 조금 보편화된 ‘님’ 문화가 시행되던 초창기여서, 상무님 / 팀장님 같은 주요 직급을 제외하곤 선후배 가릴 것 없이 ‘님’ 자를 붙였다. 지금도 참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오글거리는 호칭이다.)

 “와이프도 직장 마치고 오면 보통 8-9시쯤 집에서 만나는데, 이것저것 씻고 뭐 하다 보면 금세 10시야. 티브이 뭐 한두 시간보다 잠자면 끝인데 저녁 차리고, 그것 또 치우고.. 에휴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아침도 회사 와서 먹는 거처럼, 저녁도 먹고 가는 게 제일 편해.”

 “그럼 평소에는 형수님이랑 식사도 잘 못 하시는 거예요?”

 “뭐 주말에 쉴 때나 같이 먹는 거지. 근데 그것도 뭐 양가 집안 행사 있고, 결혼식 오고 가고 하다 보면 두세 끼도 같이 잘 못 먹어. 그것도 차려 먹기 귀찮으니깐 주로 나가서 사 먹지.”

 뒤늦게 취업에 성공해서 나이는 이미 서른을 넘겼지만, 그래도 꼴에 신입사원이라고 참 순수했나 보다. 당시 선배의 그 말에 적잖이 놀래서 지금까지도 생생히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신입의 티 따위는 한참 전에 벗어내고 노련미 풀풀 풍겨대는, 5년 뒤 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는 대리급의 선배가, 이제 막 결혼해서 달달한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을 거라 생각한 새신랑의 모습에서 실낱같은 두 가지 꿈마저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짬이 차면 좀 낫겠지?’ ‘그래도 결혼하면 좀 나을 거야.’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고 나 혼자 만들어내긴 했지만, 힘겹게 붙들고 있던 두 가지 희망.   

 ‘5년 뒤에도 나는 구내식당 식판에 밥을 퍼 나르듯, 야근 거리를 주워 나르고 있겠구나.’

 ‘결혼해서도 나는 지긋지긋한 구내식당 밥을 급식처럼 먹고 있겠구나. 하루 세끼 전부 다.’

 식판에 밥과 반찬을 퍼다 나른 나는 팀장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본사 발령에 자식과 아내를 대구 본가에 남겨 두고 서울에서 1000에 40 짜리 원룸 생활을 하고 있는 42살 팀장님. 천지 사방이 온통 암울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재차 확인하게 된 순간 역시 기억이 선명하다. 나의 퇴사 선언을 보고 받은 상무님께서 나를 호출했다. 상무님은 원체 나 같은 신입과는 겸상도 안 할 정도로 짬 차이가 많이 나는 분이었고, 나름 사내에서는 ‘성공신화’로 다뤄지는 인물이라 면담의 분위기는 역시나 일방적이었다. 그만두는 나의 사연을 듣기보단 훈계의 말씀들을 쉴 새 없이 이어나갔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좀만 힘들어도 관둔다는데, 그런 걸로 관둘 거면 나도 100번은 더 그만뒀을 거다.”

 “한 직장에서 그만두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또 그만둬.”

 예상 시나리오 있던 대사들과 어쩜 그리 일치하던지. 물론 상무님의 면담 내용에 따라 퇴사 결심을 바꿀 생각은 1도 없었다. 그래도 퇴사를 결정한 이유들과 그동안 힘들었던 점들에 대해서 상무님께 넋두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 정도는 했었는데 역시나 어림없었다. 그래도 시종일관 훈계 일색으로 흘러가던 대화의 막판 부드러운 회유와 함께 나름 희망적인 동기부여도 해주셨다.

 “난 지금 자리에 오르기까지 20년 넘게 걸렸는데, 요즘은 시대가 빨라서 12-3년? 아니 본인 능력만 인정받으면 10년이라도 가능할 것 같아. 한빛아. 좀만 고생하자. 정신 바짝 차리고 10년만 고생하면 나처럼 될 수 있어!”

 ‘뭐라고요? 1년도 아니고 10년을? 그냥도 아니고 정신 바짝 차리고 고생해야 상무님처럼 될 수 있다고요?’




 상무님 책상 위엔 작은 액자가 있었다. 상무님, 아내 분, 상무님의 어여쁜 딸이 담긴 가족사진. 딸은 하와이로 조기 유학을 떠났다 했고,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아내 분 역시 하와이에 머물러 계셨다. 상무님은 소위 말하는 ‘기러기 아빠’였다. 그래도 동남아 쪽이 아닌 나름 미주, 하와이로 떠나보낸 성공한 기러기 아빠. 기러기 아빠들의 숙명인지, 1년 단위로 사업부의 성과에 따라 목숨이 좌지우지되는 임원들의 숙명인지, 상무님의 하루는 온통 다 회사였다. 임원급 회의가 보통 7시에 열리는 탓에 상무님의 출근시간은 사업부의 그 누구보다도 빨랐고 퇴근 시간은 딱히 정해진 것도 없이 늘 거래처, 유관 부서 임원들과의 술자리의 연속이었다.

 아니 하다못해 군대도 2년 정도 지나면 늦잠도 좀 자고 작업이나 훈련에서 열외도 좀 하고 뽀글이도 실컷 끓여 먹게 해 주는데, 생각해보니 회사는 군대보다 더 잔인한 곳이었다. 10년이나 걸려서, 그것도 정신줄을 반쯤 놓고 살아도 쉽지 않은 일상을 정신까지 바짝 차려가며, 생고생을 해가며, 살아야 얻을 수 있는 ‘값진 열매’의 모습이 상무님이라니. 공짜로 쥐어 줘도 마다하고 싶은 삶인데.

 ‘10,20대 그리고 백수 시절에는 내 앞길이, 나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불안하고 답답하다.
  하지만 취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나의 미래가 너무 뻔히 보여서 불안하고 답답하다.’

 내가 처음 겪은 회사에서의 미래는 너무도 선명했다. 신께서 혹시 내가 못 보고 지나칠까 싶은 노파심에 천지사방에 흩뿌려 놓은 것 같았다. 식판을 퍼 나르던 옆자리 선배, 맞은편 팀장님 그리고 파티션 너머 사업 부장실에 앉아계시던 상무님까지. 뻔한 내 미래의 모습들이 ‘어서 오라고, 별 거 아니라고, 다들 이리 산다고, 너도 곧 이렇게 될 거’ 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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