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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선생 Aug 13. 2019

[퇴사일기 #2] ‘소꿉놀이’와 ‘회사 놀이’  


 어린 시절, 그리 즐겨하지는 않았지만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통용되던 놀이가 있었다. 바로 ‘소꿉놀이’. 엄마, 아빠 역할을 정해서 그에 맞는 일상적인 일들을 함께 수행하는 놀이이다.

 요즘 시대정신에 부합되지는 않지만, 아빠는 주로 퇴근을 해서 저녁 밥상을 당당히 요구하며 기다린다. (사실 놀이상에서 아빠는 퇴근한 후에 발 닦고 넥타이를 푸는 것 외엔 이렇다 할 역할이 없다. 그래서 대다수의 남자애들이 소꿉놀이를 싫어하는 거다.)

 엄마는 아빠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저녁 밥상을 준비한다. 저녁을 준비하는 요리 시간이 소꿉놀이의 핵심이다. 칼, 도마, 싱크대, 가스레인지 등 소품들도 화려하고 찌개, 반찬, 밥 등 할 일도 다양하다. 무엇보다 식재료인 모래와 흙이 사방 천지에 널려있다. 이래서 소꿉놀이의 주인공, 엄마 역할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애기들은 분주한 엄마, 아빠 옆에서 혀 짧은 목소리로 재롱을 피우거나, 엄마가 준비해 준 밥을 맛있게 먹는다. 때론 일부러 반찬 투정을 하며 엄마에게 혼나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고 감기에 걸렸다며 주사를 맞기도 한다. 자연스레 소꿉놀이가 병원놀이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이 소꿉놀이가 재미있게 그리고 일정 시간 놀이로서 지속되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반드시 지켜져야 될 암묵적인 룰이 존재한다.    

 ‘첫째, 역할을 정한다. 둘째, 역할에 맞는 일을 진짜처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절대 진짜로 해선 안 된다.’  

 놀이가 진행되는 동안 그 누구라도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 룰은 철저히 지켜진다. ‘여보 회사 다녀왔어요?’라는 엄마의 인사에 ‘내가 왜 니 여보야? ’라고 정색하며 따지고 드는 아빠는 없을 것이다. 애기 역시 그래 봐야 실제 엄마 아빠 역할을 하는 애들에 비해 2-3살 어릴 뿐일 테지만, 정성을 다해 애교를 떨어줘야 놀이의 재미가 더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진짜처럼’ 일 뿐이다. 소꿉놀이 속의 아빠, 엄마가 퇴근 인사를 겸해 진짜 뽀뽀를 나눠서도 안되고, 애기 역시 엄마가 맛있게 차려주는 모래 밥상을 진짜 쌀밥처럼 우걱우걱 씹어 먹어 버리면 나머지 아이들은 ‘엄마! 얘 이상해!’라고 기겁을 하며 진짜 엄마를 찾아 그 자리를 떠나 버릴 것이다..

 진짜처럼 하되, 결코 진짜로 해선 안 되는 놀이.

 1년 3개월이라는 짧은 직장인 생활, 그중에서 5개월이란 극도로 짧았던 사무직 기간 동안 내가 겪었던 회사란 조직의 풍경, 그곳에 종사하는 회사원들의 일상은 마치 이런 ‘소꿉놀이’가 업그레이드된 ‘회사 놀이’ 같았다.

 일단 각자의 역할들이 나름, 매우 체계적으로 나뉘어 있다. 교육팀의 행사/기획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아무개 과장, 영업 전략/기획 업무를 수행하는 전략팀 팀장을 맡고 있는 머시기 팀장. 소꿉놀이 상의 엄마, 아빠, 애기에 비하면 그 역할은 무궁무진하다. 역시 애들 따위가 동네 놀이터에 모여서 하는 소꿉놀이가 아닌 어른들이 오랜 시간 많은 고민 끝에 만들어 놓은 ‘회사 놀이’라 할 만하다.

 특별한 룰에 대한 설명 없이도 각자의 역할에 걸맞는, 조금씩 차이 나는 말투와 행동을 구사해야 한다. 인사를 나누는 목소리의 크기, 고개의 각도, 심지어 출퇴근 시간까지 디테일하게 달라진다. 그것도 단순히 부장은 이렇게, 팀장은 저렇게가 아니라, 부장과 팀장 사이에서는 이렇게, 대리와 사원 사이에서는 저렇게, 참으로 복잡 다양한 설정들이 그 놀이에 녹아 있다. 여기서 학창 시절 별로 써본 적도 없는 ‘개념’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직장인들은 이게 보통 재미난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모두가 이 놀이가 오래오래 계속되길 바라는 것 같아 보였다. 그 역할 놀이에 충실하지 않은 누군가가 나타나면 금세 ‘회사 놀이’가 중단되기 때문인지, 누구라도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벌이는 순간, 조언/갈굼/평가/인사이동 같은 조직적인 제재가 그를 향해 가해진다. ‘개념’이라는 단어를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단어라는 걸 군대 이후로 또 한 번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이제 갓 신입이던 내게, 다른 선배들의 업무 보조만 하던 내게 처음으로 이렇다 할 업무가 주어졌다. 디테일하게 설명하자니 업계 사람들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니 간략히 얘기해 보자면, 인터넷에 염가로 풀리는 제품의 출처를 추적해서 적정 시장 가격 유지시키는 일이었다. 법률적으로 저촉되는 부분이 있어서 조금 어렵긴 했지만, 어찌 됐든 누군가가 주도적으로 밀어붙인다면 금세 끝날 일이었다. 근데 제조공장, 제품 연구원, 마케터, 현장 영업팀, 법무팀까지 어느 하나 ‘내가 맡아서 하겠다’ 란 사람이 없었다. 이와 동시에 누구 하나 ‘난 손 뗄 테니 그쪽에서 알아서 하시라’ 란 사람도 없었다.


 맡아서 하자니 본인의 일이 많아지고, 다른 팀이나 사람이 하게 내버려 두자니 자신의 업무의 정체성이 사라질까 걱정하는 거다. 또 혹시나 잘 됐을 때 숟가락 하나라도 얹고 싶고, 행여나 잘 안 풀렸을 땐 언제 그랬나 싶게 쏙 하고 발을 빼야 하니, 그 줄타기가 애매해지는 거다. 어찌 됐든 ‘회사 놀이’에서 나의 자리와 역할은 계속되어야 하니깐.

 그래서 늘 유관 부서 회의는 의미 없이 대화가 빙빙 돌고 어느 것 하나 실행되거나 진도 나가는 것 없이 길어지기 마련이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회사 놀이’의 룰에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 역할에 맞게, ‘진짜처럼’ , 하지만 혹여라도 ‘진짜로’ 하면 안 되는.

 팀 내부에서 벌어지는 회의나 업무 역시 사실 큰 차이점은 없었다.

 회사 생활 중 손에 꼽는 스트레스, 기약 없는 야근이 지속되는 기간은 연말을 앞두고 벌어지는 ‘내년도 사업계획 수립’ 시기였다. 모든 회사, 거의 모든 팀에서 어김없이 이 ‘사업계획’ 이란 것을 만들기 위해 야근을 하며 없는 아이디어를 쥐어짠다. 하지만 실상은 아이디어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윗분들에게 보시기에 ‘적당한’ 아이디어가 부족한 것이다. 여기서 ‘적당한’ 이란 윗분들 보기 적당히 참신하면서도, 적당히 그럴싸해서 설사 윗분들이 당장 실행을 지시할지라도 큰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는 계획을 말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아이디어를 냄과 동시에 ‘그거 상무님이 진짜 하라면 어떡해? 할 수 있겠어? 나중에 했다가 안되면 우리만 독박 쓴다!’ 란 딴지가 꼭 따라붙기 마련이다. 절대 진짜로 해선 안 되는, 모두가 엑셀, PPT 파일상에서만 그럴싸 해 보이는 계획을 추리고 추리기 위해 밤늦도록 야근을 이어간다.

 절대 진짜로 해선 안 되는 일들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그래서 누군가 보기에 진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되는 일.
 쉽게 말해 ‘뻘짓’. 그 수많은 ‘뻘짓’ 들이 난무하는 ‘회사 놀이’. 그 회사라는 곳을 떠나 진짜 돈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고 싶었다. 월급이든 일당이든 댓가로 받아 드는 돈에 걸맞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일 다운 일을 하고 싶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2012년 3월 7년 전, 회사를 떠날 당시에 난, 그놈의 일이 너무도 하기 싫어서 떠난 줄 알았는데, 뒤돌아 보니 그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더 ‘진짜 일’을 간절히 하고 싶은 마음에 회사를 떠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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