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 안에 넣어둔 사직서를 눈앞에 던지고 유유히 회사를 떠나는 장면? 드라마에서나 존재하는 퇴사법이다. 현실은? 취업 규칙 위반일지도 모르겠다. 입사할 때 대수롭지 않게 작성한 근로 계약서에는 ‘퇴사 전 7/15/30일’처럼 회사에서 정한 통보 기간이 명시돼 있고 우리는 동의했을지 모른다. 또한 미리 퇴사 통보를 했다고 하더라도 뒤따르는 절차들이 있다. 이 과정 중 한군데에서라도 발목 잡힌다면 조용히 다시 일하는 수밖에 없다.
사수나 직속상관에게 퇴사 의사 밝히기→1차 면담→팀장 보고→2차 면담→임원 혹은 인사 팀과의 3차 면담→최종 결재자 승인
멋지게 퇴사하고 나면 끝일 것 같겠지만, 곧 또 다른 현실과 마주한다. 국민 건강보험처럼 납세자로서 응당 받아야 할 복지나 자기 계발비처럼 직장에서 주는 소소한 혜택이 끊기고 남들에게 내밀 명함도 없다. 놀고먹는 건 좋은데 누군가를 만날 때 자기 소개조차도 애매해진다. 더 큰일들도 마주하게 된다. 대출을 받은 경우 만기가 도래했을 때 올라간 이율에 깜짝 놀랄 것이다. 나는 똑같은 그대로의 나인데, 상황은 예전과 많이 달라진다. 따라서 퇴사를 잘하는 법이 중요하다.
몇 년 동안 회사와 업무에 시달리다 보면 자신의 과거를 잊고 마는 기억상실증이 찾아온다.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긴장하던 신입 사원 시절을 떠올려보자. 간절히 원해 직장인이 되었는데, 나는 왜 지금 퇴사를 생각하는가. 백수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다. 직장인이기에 누릴 수 있었던 여러 혜택을 포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퇴사로 잃게 될 것의 목록을 작성해보자.
월급 : 잠시 스쳐가는 사이버 머니라 하더라도 고정 수입이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
타이틀 : ‘직장인’이라는 것 자체가 나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타이틀이다. 이 타이틀을 떼고 나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나를 설명해야 한다.
소속감 :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우리는 자연스레 어딘가에 끊임없이 소속되어 왔다. 그러나 퇴사자에게는 더 이상 울타리가 없다. 즉, 모든 것을 혼자 해나가야 한다는 이야기.
퇴사 잘하는 법의 절반은 ‘좋은 날짜에 퇴사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사날부터 우리는 자유라는 현재에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따라서 자유인, 즉 백수의 삶을 좀 더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통장을 채워놔야 한다.
퇴직금 : 퇴직금 = [(퇴사 직전 3개월 임금의 합)/3 × 근속 연수] 통상적인 퇴직금 계산법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성과급이나 상여금이 포함된 달 혹은 연봉이 인상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퇴사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내가 다닌 회사의 경우, 1∼2월 사이에 전년도 성과급, 2월에는 설 상여금, 3월에는 임금 인상이 있었다. 따라서 3∼4월은 가장 많은 사람이 퇴사했던 달이기도 하다.
경력 : 퇴직금만 따져 퇴사 날짜를 정할 수는 없다. 퇴사자의 동의어는 예비 입사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7월 하반기 입사자였다. 따라서 6월에 퇴사하여 재취업을 노릴 경우 이력서에 경력 ‘6년 차(관련 경력 5년 11개월)’라고 써야 하지만 7월 퇴사의 경우 경력 ‘7년 차(관련 경력 6년)’라고 표기할 수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6년 차와 7년 차는 꽤 큰 차이다.
휴가 : 근로기준법으로 보장되는 연차 휴가도 고려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1년을 일하면 15일의 연차가 발생하며 입사 1년 이하는 연차가 없다. 연차 휴가를 모두 사용하고 퇴사하는 방법도 있고, 사용하지 않고 돈으로 보상받을 수도 있다. 나는 잔여 연차 수당을 받는 대신 연차 일 수를 모두 소진하여 경력 기간을 조금이나마 늘렸다.
퇴사 날짜를 정하였다면 본격적으로 비밀리에 퇴사 준비에 돌입한다.
재직증명서, 급여명세서, 경력증명서 : 가장 기본적으로 챙겨야 할 서류로, 이직 시 꼭 필요하다. 원천징수 영수증도 잊지말자. 연말 정산 시 요구되며, 이직할 때 연봉 협상의 기초 자료가 된다. 모두 최소3부 이상씩 갖춰두자. 퇴사 통보 전에 발급받으려고 하면 응당 용도에 대해 질문을 받기 마련인데, ‘은행 업무’ 같은 적당한 이유를 붙여보자.
명함 : 명함도 한 통 더 챙겨두면 분명 쓸 일이 생길 것이다. 퇴사 후 어쩔 수 없이 전 회사 명함이라도 내밀어야 할 상황이 올지 모른다. 또한 내 명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타인의 명함이다. 내가 회사에서 얻어가는 가장 큰 무기는 업무 능력이 아니라 인맥, 좀 인간적으로 풀어쓰면 거친 세상 속 든든한 지원군일지 모른다.
퇴사 선배들이 늘 하던 말이 있다. “퇴사 전엔 반드시 인사 팀보다 은행을 먼저 갈 것.” 당연하게 여기던 우대 금리, 마이너스 통장 등 금융권 혜택들은 퇴사 이후 만기 시점이 도래하면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다. 경우에 따라 신용카드 발급도 힘들어진다. 기존에 대출받은 것이 있다면 일단 상환하고 다시 대출을 받아 만기 일자를 연기하자. 한동안은 직장인과 동일한 직장인 우대 금리를 누릴 수 있다.
결국 퇴사란 회사에서 내 흔적을 지워야 한다는 뜻이다. 개인물품을 치우고 사용하던 회사 자산은 반납하여 자리를 깨끗하게 비워줘야 한다. 컴퓨터도 정리해야 한다. 내 신입 시절부터 함께한 컴퓨터에는 약 6년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자료 백업하는 데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회사 자료와 개인 자료는 미리미리 분리해두자.
by 김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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