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학도병의 편지
어머니가 살아생전, 둘째 아들이 사는 미국에는 합쳐 3번 오셨다. 오실 때마다 6개월을 꼬박 채우고 가셨으니 당신도 살아생전 1년 반을 미국에서 사신 셈인데, 마지막으로 오신 게 2008년인데, 그때 무료하게 집에만 계시니 안쓰러워 가요무대를 보여드린 적이 있는데, 마침 딸이 한국에도 Memorial Day와 같은 날이 있냐고 묻길래 현충일이 있는데 6.25 관련 영상물을 유튜브에서 보여주려다 몇 년 전 방영된 가요무대(명가요 60선, 1084회)를 보게 됐다. 가수 주현미가 "삼팔선의 봄"을 부르던 중, 낭독한 어느 학도병의 편지가 기억이나 그 편지 내용을 다시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어머니!
지금 내 옆에서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니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그럼....
정확히 65년 전, 1950년 8월 5일 서울 동성중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우근 학생은 까까머리의 앳된 모습을 한 채, 학도병이 되어 포항전투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전장에서 이 편지를 어머니에게 썼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또래랑 컴퓨터 게임이나 할 앳된 그 어린 나이에, 군복조차 변변히 입혀주지 못한 가난한 조국을 위해, 누구도 불러주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 석자를 스스로 부르며, 학교 다닐 때 입고 다녔던 교복을 그대로 입은 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남기고는 결국 적군의 총탄에 맞아 화랑담배 연기처럼 한 떨기 피지 못한 꽃잎이 되어 그렇게 산화한 것이다.
격전이 끝나고 시신 수습차 교복 호주머니를 뒤지다가 찾은 수첩 속 이 편지는, 피로 범벅이 되어 읽을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젖어 있던 것을 어느 살아남은 전우가 곱게 말려 보관했다가, 포항의 학도병 추모비에 새겨졌다고 한다.
유독 요 몇 년 사이 한국 군대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고들로 들썩거리는 고국에서 전해오는 암울한 뉴스를 많이 접하고 있다. 선임병들의 인간 이하의 폭행으로 갈비뼈가 부서지고 온몸이 피멍 들고 장파열에 쇼크사로 죽었다면, 군대 갔다 온 나로서도 이건 상식상의 군기 확립이란 도를 넘어 폭행인데 어떻게 동료를 전우라 부를 수 있겠냐?
그 윤일병 만일 자기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면,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까?
"어머니, 동료가 무섭습니다.
저가 말과 행동이 느리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나무 짝 패듯 집단으로 괴롭히는 선임들이 무섭습니다...."
65년 전, "전쟁을 왜 해야 하나요?" 라던 그 학도병의 어려운 물음에 답하기 이전에, 바로 지난봄 "선임병은 왜 날 모욕적으로 패나요?"라던 죽은 윤일병의 말없는 절규에 우리는 어떻게든 꼭 답을 해 줘야 한다.
세월호 참사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자식을 잃어 망연자실해 있는 부모들에게 보란 듯, 고의로 그들을 비하하려고 어묵 먹는 사진을 올려서 그 부모들의 가슴에 염장 지르는 그런 상식 밖의 비열한 행동을 하는 10대에게서 인명존중이란 단어가 있을까?
지난여름, 15살의 꽃다운 나이에 김해의 윤 모양이 왜 또래 친구들에게 짐승처럼 성매매당하고, 유린돼 살해당한 것도 부족해 주검마저 훼손시켜 콘크리트에 암매장당해야 하는지를, 그들은 왜 그런 엽기적 행동을 했는지에 남의 집 자식일이라 등 돌리지 말고, 우리 어른들은 고뇌하며 답을 찾아야 한다.
나중에 또 다시 이런 유사 사건의 가해자가 될지도 피해자가 될지도 모를 우리 자식들에게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소중함"을 제대로 가르쳤는지, "내 살자고 약자를 짓밟아도 된다"는 비겁한 꼼수를 가르치진 않았는지 냉정히 물어봐야 한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데, 지금 내 딸과 아들 앞에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사무치도록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그 억울하게 죽은 아이들에게 분명히 답을 줘야 한다.
왜 요즘 군인들은 적이 아닌, 전우인 동료를 죽이고 자살하는 일이 다발하는지, 정치인들이나 군 통수권자들에게 묻기 이전에,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계급장도 없이 이 나라 위해 청춘을 바쳤던 학도병들의 넋에 우리가 보답할 최소한의 예의이다.
고국땅 삼천리강산 발길 닿아 밟는 발자국 하나하나에도, 눈길 닿는 곳곳에도, 수없이 많은 선열들의 그 고귀하고 값진 피로 지켜 온 조국 땅이 오늘따라 헛되이 보이는 땅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그리운 고국땅을 떠나고 이민까지 고민해야 하는 세대가 나오는지 우리는 반드시 대답을 줘야 한다.
돌이켜 보면, 당시 포항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지 않았으면 어림잡아 올해로 팔순 잔치를 맞이 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손자 손녀의 재롱을 보면서 재미난 여생을 보냈을지도 모르는 그 이우근 학도병. 그의 나라 위해 바친 숭고한 목숨을 기리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는지...
내 막내 조카, 동희가 지 엄마 학비 부담될까 봐 휴학하고 아직도 강원도 삼팔선 전방부대에서 졸병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그 녀석과의 입대 직전, 외삼촌인 내게 보내준 카톡을 새로 열어봤다. 안전에 주의하라 당부했는데, 동료를 주의하라고 썼어야 했었나.....??
그 녀석이 복무하고 있는 삼팔선에도 봄은 왔을 법한데, 왠지 조카 동희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이 밤은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이 영상의 32:00분부터 재생하면 가수 주현미 씨가 삼팔선의 봄과 이우근 학생의 편지 낭독이 간주 사이에 낭독됨 : http://youtu.be/QF43WL7E0s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