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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c Apr 18. 2018

27년 만에 찾은 고향의 봄 4/9

순천 낙안읍성

2017년 4월 25일


백무동 계곡을 빠져나와 험한 지리산 골짝을 타는 대신 지방도를 타고 남원 시내에서 1박을 하고 섬진강을 건너 한시간 반을 달려 순천의 낙안읍성으로 들어간 것은 아침 8시 반경.

너무 일찍 도착한 덕에 낙안읍성의 매표소는 문을 열지 않았지만, 성내에서 주민들이 실거주하는 관계로 성문이 열려있어 공짜로 구경을 하는 횡재를 얻었다. 성문을 들어갈려니 한 할머니가 농작물을 이고 성벽 바로 아래에 붙어 있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길래 뒤를 따라가 초행이라 인사를 하니, 시집와서 이 성밖 초가집에 살고 있는데 자치단체에서 거주하면서 옛집을 그대로 보존하는 조건으로 매달 보조금을 준다고 한다.


산성(山城)이 산에 쌓여진 성이라 평상시에는 마을에서 살다가 전시에만 산성으로 주민들이 이주를 해야 했지만, 읍성(邑城)은 말 그대로 주민들이 사는 장소 둘레에 성벽을 쌓아 놓은 것이라 주거지가 바로 전쟁터인 것이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이 179개소가 나타나는데, 당시 조선 팔도의 행정 구역이 330개소인 것으로 미루어 조선시대에는 반수가 넘게 읍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읍성은 외적의 침략이 잦은 남해, 서해안 지방과 북쪽의 변방에 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낙안읍성은 고려말기부터 왜구의 침략이 잦아들자 읍성을 짖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성다운 성은 조선 중기 임경업 장군에 의해 흙담이 돌담으로 개건되었다고 한다.


성 입구에서 포장되지 않은 마을로 들어가니 오른쪽편에 재미있는 방이 붙어있어 눈길을 끈다. "방(榜), 바람난 여인"

"왕사월이면 피어나는 봄꽃의 여와이라 불리는 엘리지...... 그 엘리지를 찾으시면 관리사무소로 연통주세요"

엘리지는 우리나라의 산하에 이른 초봄 잔설(殘雪)이 깔린 찬 땅을 뚫고 꽃망울을 피우는 복수꽃등의 야생화다. 청초하고 소박한 이미지의 꽃말들이 많을 듯 한데 보라색의 이 꽃말이 바로 방에 붙혀져 있는 한복을 입은 단아한 한국여인의 이미지와 달리 바람난 여자란 한다.  아마도 초봄의 훈기를 이기지 못하고 누구보다 일찍 펴서 나무에 꽃잎이 날 때쯤이면 벌써 져버리는 것이 마치 온기가 넘치는 사랑을 참다 못해 봄에 살짝폈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서 이름하여 바람난 여자라 했던가....


성안에 들어가 왼쪽 성벽을 타고 올라가니 마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렇게 마을 전체의 모습을 한 눈에 담을 수 있게 된것이 아이러니 하게도 마을 중간중간에 있는 대나무 숲을 없애서 가능했다는 것. 내용인 즉, 사진작가들이 울창한 대나무 숲이 가려 마을 정경을 찍지 못한다 하여 이렇게 기존에 있던 대나무 숲을 없애는 바람에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고 한다.


 결국, 잘보이기위해


언제부터 왔는지 이른 새벽인데도 곳곳에는 전국에서 온 듯한 사진작가들이 저마다의 주제를 머리에 두고 마을 곳곳을 샅샅히 찍고 있다.


현재는 약 120여 가구의 300여명이 이 낙안읍성에 그대로 살고 있고, 많은 주민들은 자신의 집을 민박운영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듯 했다.


원래 있던 대나무 밭도 사진작가들의 사진을 찍는데 가린다 해서 짤라버리고, 원래 민가에 있던 토종 야생화들을 없애고 미관에 좋다는 외래종 꽃들로 심어버렸다.

흙과 돌로 만들어진 뒷쪽 읍성 담에서 내려다 보면 짚단으로 덥은 초가 지붕이 옹기종기 잘 보존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다시 마을에 내려오면 상황은 틀려진다.


보여주기식 행정을 위해 특이한 업적이 있어야 승진과 직결된다는데.

몽골식 텐트를 만들었다거나, 자전거 보관소를....


정작 관청에서 보존에 앞장서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전시행정으로 흐르다 보니 오히려 홰손해 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문화재의 사랑과 보존에 남다른 프랑스 국민들.

그 중에 문화재 관리청에 일하는 프랑스의 30대 초반의 한 청년이 자신이 사는 4층집 아파트 베란다를 유리 대신에 스테인글래스를 달았다고 한다. 이유인 즉, 고대 성당의 스테인글래스가 어떻게 환경오염에 변화하는 직접 연구하기 위해서라는 것.


물론 아파트 관리실과 주민들을 반년넘게 설득해 자신이 왜 베란다 창문을 바꿔야 하는지 설득하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글래스를 구성하고 있는 유리나 납등의 재료를 떼서 3달에 한번씩 자신의 연구소에 들고가 어떻게 대도시의 공기와 햇볕에 이 스텐레스글래스가 변해가는 지 연구했다고 한다.


벗꽃 대선이란 말이 맞게 흑토담집에 대통령 벽보가 붙여 있는게 인상적이다. 시대를 거슬러 조선 중기를 살아온 조상들이 자신들이 사는 이 고을에 붙여진 대선 벽보를 보면 어떤 소회를 가졌을까?


먼저 선인들이 이 벽보를 보고 이 나라의 5년을 짊어지고 갈 왕(王)을 뽑는 거라 감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화폐나 유명한 옛 인물들의 근엄한 초상화와는 달리 모두가 싱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이 먼저 인상적이지 않았을까?

토담집에는 간혹 담재이가 자라고 있고, 어떤 집에는 노오란 유채꽃이 정갈히 자라고 있다.

인위로 만들어진 용인의 민속촌과 틀리 여기의 집들은 원래 일반 백성들이 살던 터전이다. 마치 초가집과 흙으로 쌓은 돌담을 보노라니, 문득 유럽의 어마어마한 성곽과 비교가 된다.


우리가 어릴때 봤던 디즈니랜드 영화나 안데르션 동화책에 나오는 신데렐라 성으로도 유명한 독일 바이에른주 퓌센에 있는 호숫가의 이 흰 돌로 만들어진 고딕건물로 된 성인 노이슈반슈타인과 같은 성은 직선의 벽과 삼각형의 지붕으로 이뤄져 고색찬란하고 위엄있는 넘치는 고딕건물이다.


그런 고층양식이 없고 대궐도 아닌 일반 민초들이 사는 옛선인들의 초가집은 둥글고 넉넉한 뒷산을 배경으로 사람크기의 3배를 넘지 않게 나지막하고 둥실한 볏짚단으로 엮은 지붕에 사람키를 넘지 않는 토담으로 지어져 살고 있는 이도 지나가는 이도 위화감이 없고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유채꽃이 소복히 피어 밭 한가운데 있는 감나무 잎의 초록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산천초목을 이쁘게 물들어가 한국의 가을에는 또 어떤 풍경으로 이곳을 찾는 이에게 감동을 줄지 상상으로만 느낄수 있어 아쉽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초가집의 토담방에 솜이불을 바닦에 깔고 군불로 방을 데운 안방에서 화로에 밤까먹는 것을 연상하며 마치 어릴 적 시골집을 연상하니 이내 떠나야할 발걸음이 쉬이 띄지 않는다. 뭔가 악양 최참판댁에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마음을 녹이는 포근함과 정적 안도감은 이번 고향의 봄을 맞이해 찾은 한국에서 그 고향의 맛 그대로 느낄 수 있어 좋다.  


뒷산의 집에야  비할바는 아니지만, 뭔지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면 뭔가 포근할 듯한 느낌이 든다.


신 백조 석성'(新白鳥石城)


일반 민초들이 사는 토담집에 비해 이 관하의 벽은 돌로 만들어졌고, 위는 기와가 언저저 있다. 기와를 만들려면 흙을 구워야 하고 이럴려면 많은 나무를 베어 불을 집혀야 하기 때문에 옛날 일본에서는 그 기와굽는 것을 제한했다고 한다.


양반집의 돌담과는 달리 쉽게 구할수 있는 돌로 이뤄진 집

초가집에 잔디밭이 있고, 맷돌을 약간 굴곡있게 깔아 놓아 얼듯 보기에는 정갈한 맛이 보이기는 하나, 아무리 봐도 우리의 옛 민초들이 바닥을 잔디로 깔고 살리가 없다. 내 기억에도 어릴적 우리집은 마당이  고추나 꽃감, 아니면 찐 고구마를 널어  놓는 공간이였고, 빨래를 걸고, 뗄감을 놓아 두는 곳이였다.



다육식물들이 우리나라에 있을리가 없는데.


장독에는



성문을 나가는 길 왼편으로 서당과 관하가 있고 그 앞을 정승들이 괴이한 표정으로 성을 지키고 있다.



낙읍산성을 두루 구경하고 성문 밖에 있는 많은 음식점 중에 아침을 뭘로 할까 하다가 눈에 "벌교 꼬막 정식" 이란 데가 눈에 띄인다. 들어가니 꼬막 정식이, 꼬막무침, 꼬막전, 꼬막 양념장, 꼬막찌게, 그리고 여분으로 삶은 꼬막이 한 그릇 따로 나와 대충 이 만원정식의 밥상에 꼬막만도 한 6-70마리는 족히 되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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