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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c Apr 24. 2018

네 분의 나의 할머니들

재미교포 청소년 에세이 "나의 조국" 대상작

이번에 딸 예지가 전 미국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교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나의 뿌리 찾기" 에세이 공모전에 영어와 한국어로 각각 작성한 "네 분의 나의 할머니들"이란 글로 응모를 했는데, 과분하게도 고등학생부문 영예의 일등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발달장애를 가진 남동생이 누나가 마친 숙제를 그냥 종이인 줄 알고 찢어버려 속상해했고, 누나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면 울면서 치우고, 때로는 화가 난 동생이 누나를 힘센 손으로 때리면 그냥 맞아줬던 우리 딸.  그런 동생을 사랑으로 돌보면서 이해하고 잘 참아줬던 딸에게 고마우신 하나님이 이 상을 통해 딸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아래는 영어 원본을 딸이 다시 한국어로 작성한 것을 저가 약간 문법 수정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영하의 추운 날씨에 삶이 더더욱 팍팍해지는 가운데서 힘들어하시는 분들에게 저의 딸 자랑 이전에, 조금이나마 이 글을 통해 위안을 받으셨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려 늘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용기를 주신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5869442

- 네 분의 나의 할머니들 -

미국에서 태어난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내 한국말을 듣고 자주 나한테 하는 질문이 있다. 바로 “너 한국에서 몇 살 때 왔니?”이다. 그럼, 나는 “여기서 태어났는데요”라고 조금 자랑스럽게 대답하면, 사람들은 놀래면서 “어떻게 한국말을 배웠길래 그렇게 잘 하니?”라고 다시 물어본다. 사실, 나랑 남동생은 집에서 조금이라도 영어를 쓰면 아빠한테 지금도 혼난다.

그래서, 동생이랑 단둘이 있을 때도 한국말만 계속 사용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내가 7살 때 한국어 학교 선생님은 나보고 더 이상 학교에 안 다녀도 된다면서 한국어 학교를 1년만 다녔다. 지금은 고등학생이라 공부할 게 많아서 한국어 공부를 할 시간은 많이 없지만, 내가 중학생일 때까지만 해도 학교 숙제를 끝내고 저녁이면 아빠는 나에게 한국말을 1시간씩 꼭 가르쳐주셨다. 아빠가 한국에서 직접 사온 동화책을 읽었고, 아빠랑 책의 내용을 가지고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나는 한국어보다 영어로 말하는 게 솔직히 더 편하고, 영어와 달리. 한국말은 가족이나 친척을 부르는 이름이 너무 복잡하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가족들이 거의 모두 한국에 살아서 자주 못 보고, 몇 년에 한 번씩 여름방학 때만 만나기 때문에 부르는 호칭과 존댓말이 아직도 어렵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한국의 명절날에 아빠가 국제전화를 해서 큰아버지네나 고모들의 가족들을 일일이 인사를 하라고 전화를 바꿔 주면 나도 모르게 말실수를 할까 봐 항상 긴장되었다.

사실, 나처럼 미국에서 태어난 보통의 교포 아이들은 요즘 유행하는 K-Pop을 좋아는 하지만, 내 한국 친구들을 봐도 한국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다니는 학교의 PTA 모임이 있을 때 자기 부모가 엉터리 영어를 할 때면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 창피해하는 2세들이 많다. 자신이 한국말도 제대로 못 하고 부모의 나라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그런 교포 아이가 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나한테 어렸을 때부터 한국어 교육을 집에서 엄하게 시킨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집안의 어른들은 친할머니 빼고 모두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다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른다. 게다가, 몇 년에 한 번씩 한국 갈 때마다 나랑 남동생을 귀여워해 주셨던 할머니도 벌써 4년 전에 병으로 돌아가셔서 나에게는 지금 "할머니"라고 부를 사람이 없다. 그런데, 사실은 나에게는 “할머니”라 부르는 할머니가 지금 4명이나 계신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미국에 할머니가 없는 나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기 위해 아빠는 이런 할머니들을 계속 만나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4명의 할머니들도 나랑 속 시원히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며 모두 나를 예뻐해 주신다.

첫 번째 할머니는 먼저 아빠가 가는 이발소의 이발사 할머니이다. 어릴 때부터 아빠를 따라 한인마트 옆 이발소에서 머리를 다 깎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아빠가 그 할머니를 “어머니, 어머니”하고 불러, 나도 모르게 할머니라고 불렀다. 아빠 말로는 이 할머니는 30대에 남편을 잃고 자식 둘을 결혼시킨 후에 한국에서 15년쯤 전에 혼자 미국으로 돈 벌러 오셔서 여기에는 가족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할머니가 쉬는 월요일이면 한국 어르신들이 있는 양로원에 무료 이발 봉사를 하는 훌륭한 분이라면서, 운전을 못 하는 이발소 할머니를 위해 아빠는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할머니 장도 봐 드리고, 가끔 일이 끝난 후 할머니에게 맨해튼 야경이나 다른 곳을 구경시켜드리면 할머니는 나랑 동생에게 맛있는 팥빙수를 사주셨다.

두 번째 할머니는 아빠랑 같은 고향 분이다. 우리랑 같은 교회를 다니시는데 치매를 앓고 있는 할아버지를 돌보고 계신다. 화가였던 할머니도 아들이 LA에서 살기 때문에 눈이 많이 오거나 할머니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아빠가 도와 드리고 있다. 특히, 지난겨울 눈이 온 날 할머니 집에 놀러 갔을 때, 한국에서 가지고 온 신기한 골동품들과 벽에 걸려 있는 오래된 동양화를 보여 주셨다. 매주 교회에서 주일날 점심을 드시는 자리에 가서 “할머니 안녕하세요” 하고 항상 인사를 드리면 할머니는 언제나 사탕이나 과자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주신다.

세 번째 할머니는 노인 아파트에서 혼자 사시는 시카고에 사시는데 내가 어렸을 때 몇 번 밖에 안 만났기 때문에 얼굴을 잘 기억 못 한다. 이 할머니는 아빠가 뉴욕 퀸즈에서 유학생으로 어렵게 학교 다녔을 때 델리 가게에서 같이 일을 했다. 고맙게도 아빠를 위해 맛있는 반찬도 챙겨 주시고 친아들처럼 대해 주셔서 알게 된 아줌마였다고 한다. 하지만, 20년이 지나다 보니 벌써 할머니가 되어 버렸고,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아빠가 몇 달에 한 번씩 안부 전화를 드릴 때 나도 인사를 하면 할머니는 언제나 나보고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이 정도로 아빠 덕분에 미국에 할머니가 3명이나 계시니 이제는 됐다 싶은데 지난봄에 할머니가 한 명 더 생기게 됐다. 바로 지난 5월, 2주간의 한국 출장을 다녀온 아빠는 그날 저녁, 거실에서 한참을 통화하더니만, 갑자기 나보고 또 한국 할머니한테 인사를 하라며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그러자, 나는 "아빠, 한국에서 또 어떤 할머니를 만났어?" 하며 퉁명스럽게 물어보며 할머니에게 대충 인사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자, 아빠는 이런 나의 말투를 꾸중하면서 어떻게 이 할머니를 알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셨다.

이 할머니는 어릴 때 한센병을 앓아 65년 넘게 한국의 소록도라는 섬에 혼자 살고 있는 올해 80살이다. 그런데,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붙잡혀있던 미국 사람들을 구해 오는 것을 TV로 보고 통일이 곧 올 거라고 믿었다고 했다. 그래서, 통일이 되면 불쌍한 북한 주민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나눠주려고 통장을 만들어 “통일통장”이란 이름으로 정부에서 생활보조금으로 매달 받는 돈의 조금씩을 저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낮 12시면 불편한 몸으로 교회에 나가서 불쌍한 북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고 했다. 그런 할머니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아빠는 그 기사를 우연히 읽고 한국 출장 중에 소록도로 내려가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 할머니의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슬픈 소록도의 옛날이야기를 아빠는 하룻밤을 같이 자며 밤늦게까지 들어 드렸고, 아빠는 미국에 있는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자식이 없는 할머니는 나한테도 이쁜 손녀가 생겼다며 내년 여름방학이면 꼭 우리를 소록도로 놀러 오라고 초대해 주셨다고 한다.

마침 어제는 추수감사절이라 아빠가 소록도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할머니는 한센병으로 굽어져 버린 양손으로 폴더폰을 빨리 펼 수가 없어 우리 전화를 몇 번이나 놓치다 겨우 통화가 되었다. 그리고, 나랑 이야기를 나눌 때 희미하지만 자상한 목소리로 내년 여름에는 바닷가 할머니 집에 꼭 자고 가라고 말씀하시는 우리 할머니. 만나 본 적이 없는 소록도 할머니 집에 남동생이랑 놀러 가서 아빠가 지난봄에 찍어온 사진으로만 본 할머니의 일그러진 손을 따뜻하게 만져드릴 수 있는 내년 여름방학이 기다려진다.

이처럼 아빠의 도움으로 나는 한국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역사 관련 영화가 미국에 상영되면 나는 아빠랑 영화관에서 한국 영화를 보고, 지난여름방학 때는 한국 수녀님 혼자 운영하는 콜롬비아 홈리스들을 위한 봉사센터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며 한국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또, 몇 년 전 영화 “국제시장”에 나와 많은 피난민을 구한 라우 선장의 묘지가 있는 뉴튼의 세인트 폴 수도원에 가서 미군의 흥남 철수에 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한국전쟁에 관한 책도 사서 읽었다. 또, 시간이 나면 북부 뉴저지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 동상이나 한국전 참전비에도 아빠랑 함께 가서 청소를 하고 있다.

나는 커서 힐러리 국무장관과 같은 외교관이 돼 나의 조국 미국을 빛내는 게 내 꿈이고,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등 5개 국어를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그런 나에게 이 꿈을 계속 갖게 도와주고 4명의 할머니들과의 따스한 정을 느끼게 만들어 준 엄마와 아빠에게 감사드리고, 한국의 가족들과 우리 할머니들이 건강히 오래 사셔서 나의 꿈을 이룬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의 뿌리인 “할머니와 부모님의 나라”에 대해 더 알기 위해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많이 더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또 다른 조국 코리아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나의 “핏줄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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