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음을 아끼자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인데,
그가 여행 중 한 주막에 들렀는데 몸이 아픈 주막집 딸아이가 그의 빨간 가방을 보자 달라고 졸라댔지만, 짐이 있어서 지금은 줄 수 없고 여행을 마치고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톨스토이는 가방을 주기 위해 주막집에 들렀지만, 주막집 아이는 이미 죽고 없어, 그는 그 아이의 무덤에 찾아가 비석에 이런 글을 새겨 놓았다. "사랑을 미루지 마라"........
마침, 어제 금요일 저녁, 딸 예지를 손녀처럼 어려서부터 귀여워해 주신 80을 갓넘긴 교회의 한 할머니의 장례식 Viewing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씻고 옷 갈아 입고 자려고 하는데 딸이 오늘은 아빠랑 같이 자고 싶다며 이불속으로 쏙 들어왔다.
딸도 이제는 생(生)과 사(死)의 정의 정도는 충분히 내릴 수 있는 어리지 않는 나이이기에 아마도 아무 말 없이 그냥 나랑 자고 싶다는 말속에는 아빠랑 살아 있는 동안 더 많이 같이 있고 싶다는 의미임을 묵언으로도 느낄 수 있다.
"언제 네가 아빠 품에서 같이 잘 날이 얼마나 많겠니? 그래 같이 자자" 하면서 껴안고 자려고 하니, 나도 딸도 익숙하지 않은 듯, 숨소리만 죽이고 잠을 못 이뤘다. 그러면서 지난 연말에 아들 예준이가 던졌던 한마디를 생각해 봤다.
"아빠 업어줘..."
이제는 나이가 벌써 13살이면 내가 업어줘야 할 나이가 아닌데도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들은 가끔씩 자기 전에 감정 컨트롤이 잘 되지 않아 우울증이 찾아오면 무엇인가 불안해서 인지 흐느껴 울기도 하지만, 무작정 나에게 업어 달라며 나한테 안긴다.
사춘기를 접어들면서 키도 나보다 큰 몸무게 50을 훨씬 넘기 자식을 등에 업고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아 때부터 이런 못난(?) 버릇을 들인 탓에 이럴 때면 폰에 저장해 놓은 잔잔한 찬송가나 바이올린 곡을 틀고, 방안 불을 끄고서 이 육중한 아들을 업고 방 끝과 끝을 왔다 갔다 하는데, 항상 그 큰 나이에도 자신의 볼을 내 볼에 비비기도 얼굴을 내 등에 기대면서 흘러나오는 곡을 흥얼거리다 잠이 들곤 한다.
아들의 체중이 적게 나가고 내가 팔팔할 때는 못 느꼈는데, 어느덧 곧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는 이런 업어주는 것도 이제는 버거워 잠자리에 들려고 하면 발목이 시큰거릴 때가 자주 있다.
하지만, 이 녀석을 지금 업어주지 않으면 오늘이 가면 결코 업어 줄 수가 없다. 톨스토이가 새겨 준 그 아이의 비문의 말처럼, 지금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할 순간을 평생 놓친다.
어제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오면서 자연스레 언젠가 있을 나의 장례식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면서 조용히 그려봤다. 나의 육신을 담은 관은 어떤 것이며, 주검의 얼굴은 어떤 모습하고 있고, 어떤 사람이 와서 내 가족들을 위로해 주며, 내 묻힌 비석에는 어떤 글이 새겨져 있고......
이런 것들은 내 사후이니 내가 육안으로 직접 볼 수가 없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들이 나를 생각하는 모습, 나를 평소 여기는 모습은 충분히 그려 볼 수 있다. 나를 그려보기에 아직도 적지 않은 시간이 나와 내 가족에게 있다. 그러니, 지금 살아 있을 때 한번 더 "사랑해"라고 말하고, 한 번 더 볼 수 있을 때 손 한 번 더 잡아주고 힘껏 안아주자........
그래서 세월을 아끼자...... Redeem the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