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태어난 곳으로(6)
화장실 너머에서 우연이 씻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너머에서 우연이 씻는 소리가 들렸다. 혜정은 어쩔 줄 몰랐다. 한 번도 남자애와 밤을 보낸 적이 없었고 한 번도 남자가 씻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은 적도 없었다.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대로 우연이 나와버리면 어떡하지. 그러면 뭐라고 말하지. 잘 씻었어? 씻고 나온 사람에게 확인을 하는 말은 꼭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면 내가 이제 들어갈게. 이것도 무언가를 준비하는 뉘앙스 같았다. 결국 혜정은 우연이 밖으로 나오기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차라리 술을 사올 걸. 둘 다 교회 밖을 나온 뒤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니 취중진담이야 얼마든지 가능했을 텐데. 혜정은 눈을 감고 우연의 방 안에 드러누웠다. 세탁기와 화장실, 그리고 부엌이 같이 있는 원룸이었다. 원룸 끝자락에는 침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반대편 끝자락에는 책장이 있었다. 기독교 서적은 하나도 없었다. 그게 우연의 책 취향이었다. 쓸데없이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 소설과 장르 소설들, 그중에서도 익히 들어본 판타지 소설 세트가 책장 한편에 전시되어 쭉 늘어져 있었다. 혜정은 우연의 책 취향이 마음에 든다는 듯 퍽 웃었다.
혜정은 우연의 부엌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찬장에서 컵을 꺼내 물을 따랐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미어터질 것 같으니 약을 먹어야 했다. 햬정이 부모님 몰래 다니던 병원의 약. 아마도 들키는 순간 철창에 갇힌 강아지처럼 교회로 끌려갈지도 모를 약. 혜정은 약을 몇 알 삼켰다. 사실 평소보다 한두 알을 더 삼킨 것도 있었다. 죽을 의도는 아니었다. 단지 평소보다 심장이 빨리 뛰었고, 더 빨리 불안해졌고, 더 빨리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잠결 너머로 우연이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어? 너 씻지도 않고 밑바닥에서 잠들었길래 침대 위로 옮겨놨어. 그 외에는 손도 안 댔다, 진짜. 우리집에 씨씨티비는 없지만 내가 진짜 방바닥에서 밤새 코도 안 골고 손도 안 대고 잘 잤으니까 걱정은 하지 마. 이래 봬도 나 소싯적에 모태신앙이었던 사람이다. 우연은 그런 말을 마구 늘어놓으면서 횡설수설했다. 혜정은 그 모습을 보고 또 퍽 웃었다. 너가 이렇게까지 당황할 때도 있구나. 너는 항상 모범생 같았는데. 혜정은 이불을 개고 일어났다. 아침은 자기가 할 거라면서 우연에게 으름장을 놨다. 오뎅국을 끓이고, 남은 밥을 푸면서 혜정은 묵혀둔 속내를 꺼냈다.
근데 나 너 모범생이어서 네가 이런 거 허락 안 해줄 줄 알았다.
혜정이 우연의 집에 온 뒤로 처음 속마음을 꺼내 들었다. 대낮 같은 아침 공기가 부드러웠고, 부드러운 만큼 속마음을 꺼내기에는 지나치게 밝은 시간이었다. 그만큼 아주 낯선 속마음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빛 속에서 살아 가지만 마음에 가둔 이야기는 때때로 빛 속에서 스러진다. 그런데도 혜정은 그런 쓸쓸한 아침에 우연에게 속마음을 꺼냈다. 애초에 우연을 만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지만 우연은 어릴 적부터 혜정의 가장 가까운 마음에 있던 사람이었으므로 혜정은 어떤 우연도 괜찮았다. 모범생 같지 않은 우연도 괜찮았다. 얼마 있지 않아 방바닥에 이불 하나만 깔고 누워있던 우연이 답했다.
나 모범생 아냐. 모범생은 너지. 난 단 한 번도 내가 모범생이라고 생각하면서 산 적 없어. 차라리 양아치면 모를까. 너를 쫓아가느라 바빴지. 네가 우리 영어학원에 처음 온 날, 너 영어 단어 시험 몇백 개짜리 만점 받았잖아. 충격이었지. 나는 몇 날 며칠 외워도 안 되는데 방금 새로 온 애가 저게 되는구나, 싶어서. 조금 질투도 났어. 너의 머리가 부러웠어. 네가 너무 좋고, 네가 너무 싫었어. 내 낙원인데, 너는 내 지옥이었어. 그래서 싫고 좋았어.
우연이 말했다. 우연은 어느새 이불을 두 주먹으로 꽉 쥐고 있었다, 혜정은 그 모습을 보았다. 우연이 이불을 꽉 쥐고 혜정에게 사실을 고백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다. 어쩔 수 없었다. 혜정은 우연에 대한 인위적인 경계심을 하나하나 깨어 나가야 했다. 억지로 쌓아 올렸던 낯선 벽들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네가 모범생인 줄 알았어. 나처럼 학원 빠지지도 않고 맨날 열심히 하고. 성실히 사는 네가, 정말 모범생인 줄 알았어. 그래서 너를 쫒아 가려고 애썼어. 너의 성실함이 나의 행복을 무너뜨리는 것 같아서 가끔은 겁이 났어. 그런데도 쫓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게 바른 삶이니까. 그게 맞는 거니까. 어릴 적부터 너는 항상 어른들의 칭찬을 받고 살았으니까. 그게 너였으니까. 너도 내 낙원이었으니까.
혜정은 거의 웃는 채로 밑바닥을 바라보았다. 어느 밑바닥을 바라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혜정의 마음속 밑바닥인지, 아니면 우연이 앉아 있는 밑바닥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신조차도.
그러다 우연이 잠시 머뭇거렸다. 입을 달싹이다 겨우 꺼낸 말은 우연의 한 마디였다.
혹시 몰라서 약봉지는 안 버렸어. 그러니까…… 네가 순간 몇 봉지를 먹었는지 모를 수도 있잖아. 약봉지에 ‘불안시’라고 적혀있길래 그냥 그 자리에 놔뒀어. 함부로 본 건 미안해. 근데 나도 내 방을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어.
알아.
혜정은 짧게 몇 마디를 건네더니 침대에서 살포시 내려왔다. 그 상태로 부엌―부엌이라고 해봤자 침대에서 부엌까지의 거리는 몇 발자국도 안 됐다―에 다가가 싱크대 옆에 있는 약봉지를 하나하나 눈 여겨봤다. 어제 순간적으로 먹은 약봉지는 세 봉지였다. 두 봉지라고 착각했던 것이 잘못하고 세 봉지를 뜯어버린 게 분명했다. 혜정은 생각했다. 벌어질 일의 경우의 수는 다양했지만 내가 그토록 긴장했던가? 그게 아니면 드디어 종교 간의 문제를 꺼내려니 긴장이 돼서 마구 약을 먹어댄 건가? 어쨌든 죽을 생각은 없었다. 혜정은 싱크대 앞에서 고민하는 혜정의 모습을 우연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그냥 싱크대 앞에서 계속 생각했다. 그러다 약봉지를 휙 낚아챘다. 그리고는 우연의 집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제 와서 뭘 더 밝힐 것도 없었다.
난 병원에 다녀. 그니까 정신과. 너는 너 혼자 힘으로 버틸 수 있어? 내게 맞지 않는 이 종교의 굴레 속에서 너는 많은 걸 버틸 수 있어? 자꾸만 부모님은 나를 때려. 왜인지는 모르겠어. 아니 사실 알고 있어. 그들은 내 몸에 사탄과 마귀가 들어갔다고 생각해. 나는 그저 나일 뿐인데도.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버티는 거야? 네가 나보다 굳세서? 네가 나보다 더 단단한 심지를 가지고 태어나서? 그래서 네가 내 낙원이었던 거야. 너는 언제나 모범생이었잖아. 물론 네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너는 속이 썩어가는 데도 잘 버텨냈잖아. 난 그게 부러웠고, 그래서 네가 선망의 대상이었던 거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뭐?
잘 생각해봐. 우리는 서로에게서 서로를 보고 있어. 네가 짓는 웃음. 나는 알아. 그 웃음이 진짜 즐거워서 짓는 웃음이 아니라 단지 사람을 대하기 위해 짓는 웃음이라는 걸. 그러니까 대외용 웃음이지. 너는 대외용 자아를 너무 잘 써. 페르소나라고 할까. 발표 동아리에서도 너는 그 남자 셋에게 이러쿵저러쿵 웃어주며 말을 건넸지. 사실은 불안하고 귀찮아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고 있었는데도 말야. 내가 이렇게까지 널 관찰하니까 이젠 불편해? 나는 오히려 너에게 묻고 싶었어. 우리가 헤어져 있는 동안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단순히 부모님의 폭력 때문에 너가 약은 사람으로 변했다는 걸 난 믿을 수가 없어. 아니, 근거가 부족해. 이렇게 말해서 미안해.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혜정은 한참을 말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연은 그런 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이불자락을 스륵스륵 스쳤다. 고요한 방 안에 혜정의 잡념과 우연의 시선만이 떠돌아다녔다. 이제는 어디부터가 정이고 어디부터가 사랑을 위한 대화인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둘만의 대화였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속박의 대화. 경험을 공유하는 일은 때로 속박이 된다. 그제야 혜정은 말을 꺼냈다.
수빈이. 수빈이라는 애가 기억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