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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May 10. 2023

우리가 태어난 곳으로(7)

혜정은 조용히 기억을 더듬었다.

   혜정은 조용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럼 오늘부터 수빈이 담당은 너네 네 명으로 확정이야. 이후에 변경해 달라고 하면 복잡해지니까 가능한 처음 그대로 가자."

  햇빛은 언제나 창을 깨고 들어왔다. 창을 깨고 들어온 햇빛은 언제나 먼지처럼 갈려 날았다. 그건 햇빛에게 아주 익숙한 분열이었다. 날카롭게 심지를 가다듬은 존재는 언제나 투명한 것들을 꿰뚫었다. 이를테면 학교의 창문이나 사람의 각막, 그리고 순수한 마음 따위의 것들.

  혜정은 네 사람 중 가장 왼쪽에 서 있었고, 교탁의 왼쪽은 항상 햇빛이 강렬히 들어오는 곳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단지 이 학교와 교실이 설계될 때부터 이곳은 유난히 햇빛이 많이 들어오는 곳이었고, 앞서 네 명이 개학일부터 호출될 때에도 혜정은 강제로 자리를 배정받은 것처럼 햇빛이 강렬히 내리쬐는 곳에 발을 붙였다. 개학일 이후 며칠의 시간 동안 교탁의 왼쪽 자리는 혜정의 자리로 고정되었고, 이것은 꼭 공식처럼 마땅한 법칙이었다.

  햇빛이 유난히 한 사람을 쏘아붙이는 동안 넷은 서로를 훑었다. 쌉쌀한 봄날의 종례시간에 네 명의 학생들은 일제히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의 호출에 응했다. 이 광경은 흡사 봉사부나 환경 미화부장을 정할 때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암묵적인 강압으로 진행되는 과정이었다. 극도로 자연스러운 강압은 언제나 의문을 낳지만 정작 혜정은 의문을 낳을 시간조차 부여받지 못했고, 따라서 네 명의 학생은 선생님의 호출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삼분 간의 설교를 들은 뒤 다시 의자에 착석했다.
  여전히 교단에 선 선생님은 이제 중학교 삼 학년이니까 고등학생이 될 준비를 해야 하며, 그 시작은 마음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기나긴 종례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종례가 길기로 유명한 삼 학년 담임 선생은 예정에 없던 ‘수빈이 담당’까지 생기는 바람에 종례를 더 길게 늘여 붙였다. 학생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며 문제집을 풀거나 쪽지로 짝꿍과 대화하기도 했지만, 학생들의 기이한 눈치작전에도 담임은 종례를 끝낼 줄 몰랐다. 학생들은 애가 닳도록 내일 보자는 선생님의 말씀을 기다렸다. 그 말이 튀어나오면 모든 학생들은 분주하게 짐을 싸고 자리에서 일어나 실컷 떠들며 교실을 나설 것이었다.

  앞문 밖에서는 혜정을 기다리는 다른 반 친구들의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친구들은 종례가 길기로 유명한 삼 학년 오 반 담임 선생을 비난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혜정에게는 비난이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혜정에게 있어 지금의 순간은 아주 지루한 연극이나 다름없었다. 이 모든 상황은 아주 작위적이었다. 서서히 종례가 끝나고 아이들이 분주해지며 선생님의 인사와 함께 우르르 의자를 집어넣는 학생들은 드디어 쇠사슬을 집어던진 것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자유 속에서 내일 보자는 선생님의 말씀이 들리자마자 차례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 곁으로 다가 선 수빈이 담당 세 명은 각자 클리어 파일에 학생 상담 사전조사표를 고이 넣어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학생 상담 사전조사표는 개학한 다음 날에 제출한 첫 번째 가정통신문으로 이 종이를 지금 들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담임과의 상담을 미리 끝마친 학생들 뿐이었다. 그러나 학생 상담 주간은 다음 주부터 시작이었고, 때때로 머나먼 학생 상담주간을 기다리지 못한 선생님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몰래 뽑아 미리 상담하기 일쑤였다.

  혜정은 아주 느릿느릿 겉옷을 챙겨 입었다. 아무리 봐도 맞아 들어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수빈이 담당’을 동시에 자원한 세 명의 학생과 끝까지 나오지 않던 마지막 학생. 그리고 종례가 끝나자마자 우르르 선생님께 달려가는 ‘수빈이 담당’ 세 명. 그들은 모두 상담 파일을 가지고 선생님과 웃고 있으며 같은 ‘수빈이 담당’이던 혜정은 먼 발치에서 교탁을 쳐다보고만 있다. 아직 시작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혜정은 이상하리만큼 스스로가 시작부터 소외됐다고 느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연극 같았다. 혜정은 이 연극을 일일히 분해하는 자신이 삼류소설에 등장할 법한 탐정이라고 생각했다. 또다시 어디선가 혜정을 부르는 다른 반 친구들의 소리가 들린 것 같았고, 그제야 혜정은 자기 스스로가 친한 친구들과 전부 떨어진 채 홀로 삼 학년 오 반에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혜영은 천천히 가방을 쌌다. 필통에 연필을 넣고 차례대로 형광펜을 정리한 다음, 마지막으로 볼펜을 넣을 때의 혜정은 사실 이 모든 것이 하늘에서 자기 자신에게 내린 벌이 아닐까 생각했다. 홀로 삼 학년 오 반에 뚝 떨어지게 된 것도, 중간이나 겨우 따라가는 혜정이 수빈이 담당을 맡게 된 것도, 종례가 끝나자마자 세 명의 우등생이 담임 선생님께 달려간 것도, 일관성도, 개연성도 없는 지금 이 순간이 혜정에게는 클리셰 범벅인 연극으로 느껴졌다.

  겨우 가방을 싼 마지막 수빈이 담당은 터벅터벅 교실 밖을 나서며 친구들과 조우했다. 어차피 그동안 비난의 화살은 혜정이 아니라 삼 학년 오 반 담임에게 향했을 것이다. 혜정은 입에서 안타깝게 구르는 혀로 마른 입을 한 번 쓸고서 재빨리 교문 밖으로 향했다.
  그래서? 너는 왜 자원한 건데?
  혜정은 하굣길에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했으나 결국 중학교 삼 학년의 반 배정에서는 뿔뿔이 흩어지게 된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선생님께서 수빈이 담당을 모집했을 당시, 처음 세 명이 잇따라 손을 들고, 이후 마지막 네 번째 학생은 삼 분을 넘게 나오지 않았노라고.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혜정은 장애인 반 친구와 진심으로 친구가 되어보고 싶었다는 소망과, 지적 장애인을 사람 그 자체로 대하고 싶다는 생각에 망설이다 결국 수빈이 도우미가 되었음을 밝혔다. 혜정의 해명에 여기저기서 친구들의 탄식이 쏟아져 내렸다. 예상한 반응이지만 혜정에게는 이 탄식이 일말의 위로인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얘는 착해서 탈이라니까. 너 그런 거 한다고 해서 알아주는 사람 없다?
  혹시 알아, 이런 것도 다 경험인데 어떻게든 되겠지.
  네 일 아니라고 막 말하냐? 애가 너무 호구같이 사니까 그렇지.
  쟤 원래 그렇잖아. 근데 혜정아 너 버거우면 앞뒤 생각 말고 그냥 때려쳐. 누가 뭐라하면 우리한테 말해야 돼. 학교 불 질러 줄게.
  여기 미래의 방화범이 있는데?
  친구들의 담소를 잠자코 듣고 있던 혜정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혼자 박장대소를 했다. 어딘가 편안하면서도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디어 혜정이 연극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혜정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말 어떻게든 될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이 모든 것은 경험으로 남아서 혜정의 속에 자라날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혜정은 집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매일 같은 길을 가는 친구들이지만 아마도 내일이면 집에 같이 가는 일은 더 이상 평범한 일상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학기 초의 봄날은 제법 쌀쌀했고, 봄이라기에는 아직도 겨울과 더 닮아있었다. 봄날에는 흔히 꽃이 떨어지며 세상이 진동하는 풍경이 떠오르지만, 지금의 혜정의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단 하나, 이 추운 봄날에 흔들리는 것이 혜정의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휴대폰에서 울리는 진동일 것이었다.
  "여보세요?"
  "그래 혜정아, 잘 들어갔니? 조금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수빈이가 며칠 학교를 나오더니 갑자기 학교에 오기 싫다고 하네. 이모님께서 내일 학교에는 데려다줄 거라는데 혹시 수업 시간에 혼자 교실 밖에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내일부터 짝꿍으로 지내줄 수 있을까? 다른 도우미 친구들은 쉬는 시간에 자주 교무실에 가잖아."
  그 순간 혜정은 이곳이 연극의 연장선임을 자각했다. 지금까지는 잠깐 쉬어가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혜정은 다시 지겨운 안경을 쓰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어설픈 연극 속 선생님의 목소리를 해석해야 했다. 이상하리만큼 이번 삼 학년 오 반의 담임 선생님은 인상 좋은 여자 선생님인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혜정의 경계심을 돋게 했다.

  이건 쉬는 시간에 자주 교무실에 가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벌일까. 혜정은 어떻게든 찢어진 의무와 문제점을 자기 안팎에서 찾으려 애썼다.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서 선생님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다른 도우미 친구들이 수빈이의 짝꿍이 된다면 수업 시간에 방해를 받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혜정 스스로가 마지막에 뽑힌 수빈이 도우미로서 짝꿍을 맡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으로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지영은 조용히 손톱 밑살로 휴대전화를 두드리며 선생님의 논리정연한 설득을 튕겨 들었다. 지적 장애인과 함께하는 일 년은 어떤 한 해일까. 혜정은 묵묵히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상인'으로 정의된 자기 자신이 일방적으로 수빈이를 정의 내리고 있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도 점심시간에는 반에 있을 수가 없어요. 아시다시피 학교 하키팀 연습이 있고……"
  "알아, 알아. 그래서 점심시간에는 다른 도우미 친구들이 수빈이를 좀 봐줄 거야. 괜찮겠지?"
  사람에게는 각자 세상을 정의 내리는 방식이 있고, 이 규칙은 혜정에게도 일맥상통했다. 혜정은 가던 길을 멈추고 몇 번이나 땅에 굴러다니는 돌을 짓밟았다. 과연 이 분노는 정당한 분노일지, 그게 아니라면 수빈이를 정의 내리듯 일방적으로 자기 자신이 세상에 전하는 화풀이일까. 애초에 새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에는 세상이 진동하는 법이다. 잔디 한 포기를 피우기 위해서도 땅은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는데 혜정이 짊어진 의무가 탄생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세상이 진동했을까. 혜정은 감히 선생님의 의도를 책임 전가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지 여러 번 생각하면서도 애초에 도우미로 자원한 것은 자신이니 이 정도의 의무는 감내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결론을 내렸다.
  "네, 그럼 내일부터 제가 수빈이 맡을게요."
  그렇게 큰일은 아니었다. 혜정은 발밑을 구르던 돌멩이와 작별 인사를 하고 휴대폰을 점퍼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라는 인터넷식 격언이 그의 머리를 훑고 지나갔지만, 지금의 혜정은 고작 내일 일만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수빈이의 악명은 중학교 일 학년 입학 당시부터 자자했다. 짝꿍 친구의 교과서를 찢는가 하면 자리에 물을 그냥 쏟고, 수업 시간 내내 종이에 볼펜을 그어대 수빈이와 짝꿍이 되는 사람은 당연히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건 순리처럼 흘러가는 일들이었을까. 혜정은 하키팀 연습이 끝나고도 남은 시간에 공부하는 자기 자신이 더 이상 성적을 올릴 수 없음을 알았다. 다른 친구들은 운동도 하지 않고 오로지 고등학교를 위해 온갖 예습, 복습을 다 하는데 혜정은 정작 대회에 신경을 쏟느라 날이 갈수록 공부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선출 선수로 빠지기에도 공부와 운동,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는 혜정은 너무나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이 모든 고민은 그저 오늘 밤의 혜정을 꿈속에서 허덕이게 하는 혼란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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