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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Jul 21. 2023

우리가 태어난 곳으로(8)

선생님이 당당히 말했다.

    선생님이 당당히 말했다.

  자, 그러면 오늘부터 혜정이가 수빈이 짝꿍을 맡아주기로 했으니 혹시 수빈이가 무슨 일 벌이면 다른 친구들이 도와주고, 혜정이도 수빈이 잘 보살피고. 수빈이는 이제 막 학교 도착해서 십 분 뒤면 반에 들어올 거야. 우리 반 오늘 기술 가정 시간 들었나? 그럼 이따가 봅시다.
  담임 선생님이 출석부를 들고 교실 문을 나서는 동안 혜정은 선생님의 머리통을 노려봤다. 물론 혜정도 악명 높은 수빈이의 이름에 밤잠을 설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선생님까지도 수빈이가 없는 이 '정상적인 교실'에서 사람 하나를 이런 식으로 취급할지 몰랐다. 여전히 혜정의 옆자리는 텅 비어있었고, 아직 홀로 학교에 도착하지 않은 학생은 반 친구들에게 위치가 즉시 보고되는 중이었다. 애초부터 선생님은 이 반이 시작될 때부터 악명 높은 빈자리 학생을 하나의 사람으로 보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고작 잔디 한 포기를 피워내기 위해서도 온 세상은 진동하는데 어쩌다가 수빈이는 반 친구들의 감시 대상이 된 것일까. 그러면서도 정작 수빈이의 직접적인 감시 역할을 맡은 혜정은 고작 수빈이의 처지나 걱정하는 자기 자신이 지극히 모순적이라고 느꼈다.
  그러니 이 교실과 혜정이 밟고 있는 세상은 아주 인위적인 것이다. 누군가 잘 짜인 무대 세팅으로 교실을 만들고 적절한 배우를 섭외해 공부하는 학생들 연기를 지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잘 짜인 무대 안에서 혜정은 배우로 섭외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비정상적인 교실 안에서 진실된 인물은 어쩌면 혜정 자기 자신과 수빈이밖에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혜정에게 수빈이는 의지해야 할 대상일까. 지극히 정상적인 수빈이는 어쩌다가 비정상적인 학생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수빈이의 악명은 무엇을 위한 악명일까. 아니, 애초에 수빈이는 장애 학교를 놔두고 왜 일반 중학교에 진학해 문제아를 자처한 것일까. 어디선가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게 학교에 불을 질러 주겠다는 친구의 극단적인 발언인 것 같기도 하여 혜정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밤잠을 설치는 동안 간간이 꾸던 꿈속에서 현실은 몇 겹으로 중첩되었다. 그 순간 혜정은 이 현실을 한 겹, 한 겹 벗겨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순간은 어쩌면 밀푀유처럼 바삭이는 몇 겹의 빵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든 껍질을 벗겨내고 나면 진실된 세상이 드러나 수빈이와 혜정의 관계를, 그리고 이 비정상적인 교실의 실체를 누군가 알려줄 것이다.      

  혜정은 언제나 사람의 머릿속이 하얗게 눈이 내린 황무지 같다고 생각했다. 보송보송한 황무지에는 생각과 시간이 야생의 동물처럼 도사리고 있고, 둘은 언제나 서로 천적 관계였다. 어떤 백지에서는 생각과 시간이 짝을 이뤄 동시에 죽기도 했지만, 혜정의 백지에서는 항상 생각이 시간을 잡아먹기 일쑤였다. 그만큼 수빈이와 비정상적인 교실에서의 연극은 자꾸만 백지를 부풀렸고, 부풀어 오른 백지에서 혜정의 시간은 자주 멸종했다.

  교실의 뒷문이 스르륵 열리는 순간, 혜정은 이미 많은 시간이 죽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많은 생각도 시간을 죽이다 함께 사라졌음을 자각했다. 밝고 화창한 열여섯의 교실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죽음이었다.

  교실의 사람들은 일제히 뒷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사람은 다시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문제집을 풀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수빈이의 몰골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상을 찌푸리고 완벽한 교실에 침입한 이방인을 눈빛으로 비방했다. 수빈이는 스펙트럼처럼 연속된 시선을 받으면서 쭈뼛쭈뼛 걸음을 내딛었다. 수빈이의 머리는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헝클어져 있었고 아래로 묶은 머리는 삐쭉삐쭉 튀어나와 전혀 단정해 보이지 않았다. 뼈만 남은 수빈이의 어깨 위로 간신히 버티는 흰색 바람막이와 어깨뼈를 잘게 부술 것처럼 아래로 치닫는 핫핑크색 백팩은 전혀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중학생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빈이에게도, 혜정에게도 낯선 이 교실에서 혜정은 이방인의 안내자를 맡았다.      

  그 뒤의 일은 안 봐도 뻔했어. 수빈이는 언제나 난리를 쳤지. 내가 정리해 온 필기 노트를 찢는가 하면 내 포스트잇을 전부 한 겹 한 겹 벗겨내서 반 전체에 붙이고 다니곤 했어. 모두가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고 네가 아는 가식적인 웃음을 개발했지. 졸업 즈음 반 아이들이 돌린 롤링 페이퍼에는 내가 잘 웃고, 아주 착한 아이로 기억되어 있었어. 뿌듯했지. 처음으로 모두를 속였다는 생각에 온몸에 희열이 벅차올랐어.

  우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연은 그저 집에서 맞고, 학교에서는 축구를 하며 시간을 떼웠다. 그런저런 성적이었지만 인성이 좋다는 이유로 모범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우연의 학교에는 지적 장애인을 따로 받아주는 시스템이 없었다. 우연은 다시 바닥에 드러누워 생각했다. 내가 애써 쓴 필기 노트를 누군가 찢어버린다면 무슨 느낌일까. 하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내지 못한다. 내가 애써 적은 교과서 필기에 누군가 물을 쏟아버리면 무슨 느낌일까. 그렇게 우연은 혜정이 말을 이을 때까지 무슨 느낌일까를 반복했다.

  뭐, 네가 내 곁에 있어 줬던 왕따당하던 시절은 중학교 일 학년이었고, 그냥 선배들 텃세 때문이었어. 그래서 난 늘 널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지.

  우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연은 그저 매주 일요일마다 나오는 낙원 같은 혜정의 말을 꿋꿋이 들어줬을 뿐이었다.

  어떤 우연은 기적이 되곤 한다. 그는 그 말을 곱씹었다. 자꾸만 어른거리는 눈물 맺힌 중학교 일 학년의 혜정이 생각나서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아니라 우연은 혜정을 마음으로 안아줘야 했었다. 우연은 이제야 생각난 결정적인 해결책이 너무나도 후회됐다. 그러자 혜정이 말을 이었다.

  사실 이게 끝은 아니었어. 친구들이 내가 수빈이 담당을 맡겠다고 하자마자 한숨을 내쉰 이유도 있었지. 난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그런 아이들을 쭉 맡아왔어, 선생님들은 존경받아 마땅하지만 어떤 선생은 귀찮다는 이유로 학생 하나를 찝어 장애 학생을 맡기는 경우가 다반사였거든. 그 아이 이름은 민서였나. 나는 우연찮게도 그 아이와 일 학년부터 사 학년까지 같은 반을 했어. 신기하지 않아?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들이 인위적으로 나를 민서와 붙여둔 거였더라고. 그래, 제법 화가 났어. 났는데.

  우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애는 무얼 믿고 자신에게 과거사를 다 털어놓는 걸까? 만약 우연이 혜정의 이야기를 퍼뜨리기라도 한다면? 이대로 우연이 혜정을 못 본 사람 취급해버린다면? 우연은 혜정의 속내가 궁금했다. 과거 이야기를 들어도 도무지 혜정의 속내는 파악되지가 않았다. 그저 어린아이. 아직도 어린아이일 뿐인 혜정은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우연은 그런 혜정을 바라보면서 중학교 일 학년의 혜정을 다시 겹쳐보았다. 그제야 혜정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학교에서 몰래 불러서 굿네이버스 상장을 주더라. 육 학년 말에 말이야. 가장 착한 아이였다면서 학교 대표로 굿네이버스 상장을 받았지. 그냥 나는 웃었어. 기쁘지 않았어. 입 다물라는 소리처럼 느껴져서 열세 살의 나는 그저 상장을 발로 짓밟고 싶었지. 하지만 그렇지 않고 상장을 든 채 웃음을 지으며 즐겁게 사진을 찍었어. 그게 다였어. 뭐 가끔 내가 민서의 연필을 훔쳤다느니 말도 안 되는 의심을 받아서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지. 적반하장으로 교사였던 민서 어머니는 사 년 동안의 나를 잊고 내게 무작정 화만 냈어.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런 어른도 있구나. 어른이 되면 완벽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그래서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렸어. 근데 이걸 어째, 네가 중학교 일 학년 때의 날 구원해버렸지 뭐야. 아니, 구원이라는 말 쓰지 말까? 죽으려던 날 살리지 뭐야. 너, 네가 했던 말은 기억나?

  그 순간 우연은 동공이 흔들렸다. 아무 생각 없이 던졌던 말이었기에 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와서 혜정에게 던졌던 말이 기억날 리 없었다. 우연이 당황하며 눈알을 굴리고 있자 혜정이 배시시 웃으며 그랬다.

  우리는 쓰이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고. 존재가 먼저라고. 이상하지? 인터넷이나 책에서 많이 볼 법한 문장인데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나는 어이가 없더라. 그 말 한 마디에 지금껏 묵힌 속이 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어. 이상했어. 네가 내 낙원이라 그런가? 그냥 웃음만 나왔지. 그래서 여기까지 왔네.

  혜정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겉옷을 걸쳤다. 그리고는 들고 온 가방을 멨다.

  내가 약 먹는 건 비밀로 해줘. 알지?

  그러면서 혜정은 가식적인 웃음을 내보였다. 아무래도 습관성 웃음인 것 같았다. 서글서글한 웃음과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꼬리. 그 사이에서 우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응, 한 마디만 소리 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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