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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May 10. 2023

우리가 태어난 곳으로(9)

혜정은 그렇게 씻지도 않고 우연의 집을 나섰다.

  혜정은 그렇게 씻지도 않고 우연의 집을 나섰다. 우연은 골목이 큰길로 이어지는 곳까지만 혜정을 바래다줬다. 어차피 바로 눈앞에 지하철역이 있었으므로 혜정은 더 이상 길을 헤맬 필요가 없었다. 우연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아마도 다시 만날 날은 다음 주겠지.

  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살고 있어. 우리 다시 만나야 하니까. 과제도 열심히 하고, 죽지 말고, 어색해하지도 말고, 이 삶에.

  우연이 웃어 보였다. 혜정은 그 웃음이 괜히 자기 자신의 가식을 따라하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 마, 그런 거.

  혜정이 그랬다. 우연에게, 너는 가식을 말하지 말라고. 가식으로 위장하는 건 나만 할 테니까 너는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우연은 즉각 대답했다.

  알았어. 그러면 그냥 울면서 보낼까?

  그제야 혜정이 웃었다. 우연이 그동안 본 것 중에 가장 기쁜 웃음이었다.     

     

* * *          


  이 년이 어디서 외박을 하고 들어와. 미쳤어? 여자애가 몸 잘못 사리면 큰일 난다는 것도 몰라? 외박 안 된다고 어릴 적부터 몇 날 며칠을 말했는데 그걸 어기고 통보하듯이 외박을 해? 너 걱정하는 부모는 어떡할 거야. 너 걱정하는 가족은 어떻게 하고 통보만 한 채로 여자애가 외박을 해!

  혜정의 부모가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혜정은 순간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닌가 했다. 내가 천사라면, 이 사람들을 이제야 벌할 차례니까. 이렇게 맞고 멍이 들어 가슴이 시퍼렇게 변하면, 이제야 내가 흰 날개를 펴고 이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차례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혜정은 계속 버텼다. 어쩌면 우연과 나는 이미 천사가 되었는지도 몰라. 비가 오는 날 하나씩 살아남은 여자와 남자 천사인지도 몰라. 아니면 태초에 존재했던 아담과 하와인지도 모르지. 자꾸만 손찌검이 쏟아졌다. 혜정은 어느 순간 아프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날개를 편 채 정신을 잃었다.

  혜정은 하늘을 날아 맞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볼에는 힘이 없었고 축 맥없이 늘어진 몸은 꼭 망자의 것 같아서 이미 이곳이 황천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혜정은 익숙한 이 기시감을 알았다. 맞을 때마다 몸에서 튕겨져 나오는 것 같던 이 느낌. 알 수 없이 삼인칭으로 변하는 이 시각. 나는 뚜렷이 정신을 잃었는데도 꼭 사후 세게가 있다는 것처럼 암시하는 그들의 말과 태도.

  혜정은 점점 두려워졌다. 이렇게 몸에서 튕겨져 나갈 때마다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이미 학창시절에 뛰쳐나온 교회에서 배웠던 성경 구절이 자꾸만 생각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었고, 언제나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것은 우연과 사건의 연속이었기에 잠들 듯 쓰러진 혜정은 늘 그렇듯 몇 시간 뒤 겨우 눈을 떴다. 일단 서랍에 넣어둔 비상약으로 피가 나는 곳은 소독하고 후시딘을 발랐다. 그러나 오른쪽 손목에는 상처가 많이 나서 덕지덕지 밴드를 붙이는 것보다 차라리 붕대를 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는 아스팔트에서 강하게 쓸렸다고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거짓말을 해대면 그만이다. 혜정은 천천히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오른손에 붕대를 감았다.          


* * *


  동아리 발표날이었다. 혜정은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얼굴에 마스크를 쓴 채로 발표를 시작했다. 사람들 말로는 감기에 걸린 것 같지는 않았는데 감기 기운이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을 혜정이 서글서글하게 퍼뜨렸다고 했다.

  우연의 조 발표자는 혜정이었다. 애초에 혜정과 우연은 동아리에 놀러 온 다른 조원들에게 기대를 걸지 않았다. 혜정이 가식적인 웃음과 목소리로 1차 진행 상황 컨펌의 발표자를 맡았다. 혜정은 먼저 서글서글한 웃음을 띄워 올렸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종교는 우리의 삶을 붙들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진통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객관적인 시선에서죠. 물론 저희 조에는 종교 철학을 전공하신 분이 없기에 이는 단편적인 발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대중의 시선은 언제나 이슈를 만듭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저희만의 이슈를 만들어보기 위해 종교를 이렇게 정의 내렸습니다. 우스갯소리로 말해보자면 꼭 타이레놀 같달까요?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 현대의 종교는 타이레놀, 또는 대마초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종교를 단순한 약으로 지칭하는 발언에 언짢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무교인 사람들은 헤정의 말을 들으며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즉시 혜정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죽은 송장처럼 영안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것 같은 혜정의 표정은 자못 진지해 보였다.

  “그러나 한스 큉은 결국 모든 종교가 근원적으로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바벨탑을 지었습니다. 그 바벨탑은 하나의 종교에 의하여 와해됐죠. 이것은 특정 종교를 저격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비유일 뿐입니다. 우리는 여러 종교 아래 서로의 종교가 옳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장과 주장이 덧칠된 토론장에 수용은 없습니다. 이는 그저 무분별한 싸움에 불과합니다.”

  강력한 타이레놀에서 어느새 이야기는 종교의 화합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1차 발표 컨펌이라 그런지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결국 마지막에 혜정은 이런 말을 했다.

  “……그러니 우리의 언어가 흩어지도록 무너진 바벨탑은 언젠가 완공될 것입니다. 평화라는 종교 아래,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될 것입니다. 각자의 종교는 다양성과 오류를 인정해야 합니다. 현재의 것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가치를 바라보고 타 종교마저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너진 바벨탑이 완공되는 길이자 평화입니다.”

  사람들은 혜정의 1차 발표가 끝나자 박수를 쳤다. 전 팀이 발표를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즉석 개그콘서트를 열어서인지 발표 동아리의 회장과 부회장의 얼굴은 이전보다 못내 밝았다. 혜정의 발표력은 가히 가식적인 듯 인위적이었으나 꽤 괜찮았다. 상황에 맞춰 얼핏 띄워 올리는 웃음도, 내용이 진지해질 때면 기꺼이 낮추는 목소리도 우연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우연은 가만히 혜정의 얼굴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질 때 혜정은 우연의 눈을 바라봤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남자 셋이 혜정이 자기 자신을 바라봤다고 서로 아웅다웅 싸우기 시작했다. 그 싸움을 보고 우연은 픽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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