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잘했네.
우연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혜정에게 건넨 말이었다. 우연의 예상과는 달리 혜정은 오늘 자기 집에서 잔다고 했다. 저번에 외박하고 집에 들어갔을 때 일이 아주 크게 났다면서,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우연은 결국 혜정의 말을 대충 알아들었다. 그날 이후 혜정은 맞은 것이 분명했다. 차마 폭력의 주체를 직접적으로 욕해줄 수는 없었다. 무력했다. 어른들이란 그런 것일까. 불타오르는 청춘이면 모두 생각한다던 그 말이 우연의 심장 속으로 박혀 들어왔다.
얼굴은 괜찮아?
우연은 혜정에게 반쯤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얼굴은 괜찮은 거야? 얼굴이 아니면 다른 곳이라도. 우연은 혜정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야 그들은 서로가 낙원이자 지옥이었으니까. 서로에게서 공감을 찾고 서로에게서 열등을 찾아 자기 자신을 갉아먹었으니까.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우연은 혜정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혜정이 마스크 속으로 픽 웃는 소리가 났다. 바람 빠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감정이 얽힌 사람이 들으면 꼭 비웃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우연은 혜정이 비웃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숨길 수 없는 거짓을 들켜버린 사람처럼 맥없이 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응, 맞았어. 여자애가 어딜 외박을 하고 들어오냐고. 그게 다였어, 몸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혜정은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이미 그 위험을 충분히 예지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혜정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연은 괜히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우연과 혜정은 평소와는 다르게 학교 정문으로 나섰다. 동아리 회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학교를 나서는 길은 쓸쓸했으나 발표를 마친 오늘은 더 쓸쓸했다. 어쩌면 그것은 혜정 때문일 수도 있었고, 이번 주 주말이면 본가에 내려가 가족들과 대면해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우연은 언제나 사건을 불러왔다. 처음으로 우연과 혜정이 만났던 것처럼.
이후 동아리 회식이 시작됐다. 1차 컨펌을 준비하느라 다들 고생했으니 단체 회식과 함께 술을 마시자는 뜻이었다. 우연은 혜정을 흘긋 쳐다봤지만 혜정은 그저 웃음을 쓰리게 지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교회를 나온 지가 언제인데 술을 안 마시냐는 소리 같았다.
예상대로 혜정은 우연과 같은 테이블에서 무려 소주와 맥주를 말아 마셨다. 게다가 혜정은 자기가 기막힌 비율을 안다면서 소주와 맥주에 사이다를 섞어 마시기도 했다. 이러면 꼭 사이다 맥주 같다면서, 혜정이 빙긋 웃어 보였다. 우연은 어쩔 수 없이 혜정의 텐션에 따라갔다. 대신 혜정이 마시는 술을 죄다 받아먹지는 않았다. 우연은 술에 제법 약한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한 번의 절정이 끝나자 서서히 일어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떼를 틈타 우연과 혜정은 시선을 맞교환하고 짐을 쌌다. 집으로 되돌아갈 시간이었다.
* * *
혜정이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간 혜정은 이 비가 하늘에서 내리는 칼날이 아닐까 생각했다. 드디어 함께 교회를 탈출한 동지를 찾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늘에서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닐까 혜정은 잠시 불안에 떨었다. 어릴 때 속히 들은 이야기들은 성인이 된 혜정의 속에도 여전히 무르익어 있었다. 언젠가 걷다 보면 어릴 때 불렀던 찬양이 툭 튀어나오고, 버스를 타다 보면 성경 어디 한 구절이 불쑥 기억에서 떠올랐다. 지우려야 도무지 지물 수 없이 굳센 문신처럼 남아버린 기억들이 혜정의 머릿속을 채웠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혜정은 옷 냄새를 맡았다. 얼굴은 분명 살짝 붉어져 있는데 혹여라도 몸에서 술 냄새가 날까봐 걱정이 된 탓이었다. 혜정의 부모님은 언제나 혜정이 술을 마시면 불같이 화를 냈으므로 혜정은 잠시 동안이라도 바깥을 서성거려야 했다.
비가 오고 있었다. 우산이 없었다. 버스 정류장은 천장을 악기처럼 토도독 빗소리를 연주하고 있었고 웅덩이는 연주를 몸처럼 받아들였다. 혜정은 우연이 생각났다. 우산은 있을까. 언덕길 올라가는데 미끄럽지는 않을까. 차라리 오늘은 우연의 집에서 자고 그냥 집을 나올걸. 혜정은 그런 생각은 순간 했다.
그래, 집을 나오자.
술기운이 어느 정도 가시자 혜정은 평소와 같이 집에 들어왔다. 왜 이리 늦었냐는 부모님의 질문에는 동아리 발표 준비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피피티를 만들었다고 둘러댔다. 혜정은 가방에 꼭 필요한 옷가지만 생겼다. 전공과 교양책은 평소 학교 사물함에 놓고 다니니 괜찮았다. 그러다 책상 밑을 뒤지니 조금 더 큰 에코백이 하나 나왔다. 혜정은 에코백에 옷가지를 쑤셔 담기 시작했다. 아끼던 인형은 진작 가방에 담았다. 계속해서 혜정의 방에 큰소리가 나 이상했는지 혜정의 어머니가 혜정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너……너 뭐하는 거야?
순간 혜정은 얼어붙었다. 애초에 방문은 잠기지도 않았다. 그런 환경 속에서 좀 더 조심히 짐을 싸야 했는데 혜정은 자기 자신의 불찰이었다며 속으로 스스로를 탓했다. 그러나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맞서 싸워야 했다.
저 집 나가려고요.
그 말에 혜정의 아버지가 달려왔다.
뭐?
저 집 나간다고요. 맞는 것도 못하겠고 고작 종교 하나 가지고 집이 매일같이 부서지는 걸 도저히 못 보겠어서. 유일한 해결책이잖아요. 말광량이 말도 안 듣는 딸이 집 나가는 거. 당분간 친구 집에서 살면서 집 알아볼게요. 월세랑 보증금은 알아서 채울 테니까.
혜정은 자신의 말이 부모의 몸에 대못을 박는 말이라는 거 알았지만 그대로 발설했다. 그동안 몸에 든 멍의 개수를 세면 왠지 대못의 숫자보다 더 많을 것 같았다.
너……미쳤어? 어딜 나가. 집도 안 알아보고 여자애가 혼자 어디 나가서 살겠다는 거야!
혜정의 어머니가 소리를 꽥 질렀다. 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를 노려봤다. 그럴 거면 몸에 멍이 들게 하지 말았어야지. 적어도 사춘기의 방황이라면 자유라도 줬어야지.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어떻게 숨통을 틀고 살아갈 수 있는데. 수많은 말이 속에서 울렁였지만 도무지 내뱉을 수 없었다. 중학교 시절 학교 대표 선수도 뛰었던 하키 경기를 생각하며 혜정은 미처 다 싸지 못한 짐을 들고 방문을 밀어 붙였다. 그리고는 대충 아무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서 계단으로 도망쳤다. 뒤에서 어머니인지 아버지인지 모를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났고, 어디선가 혜정을 추격하는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혜정은 더 빨리 뛰었다. 아차, 밖에 비가 왔었지. 혜정은 짐을 업어 들고 버스 정류장까지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 사이에 부모님이 잡으러 오면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구 뛰었다. 그러자 드디어 우연의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부모님의 인영은 거리의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혜정은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자마자 간절한 마음으로 우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웬일이냐는 듯 우연이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전화를 받았다.
비가 와…….
혜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 너머에서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에서 울리는 알람보다도 더 기다란 울음이었다.
갈 데가 없어. 친구 집에 가서 자겠다고 했는데 막상 떠오른 집이 너네 집이었어.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할게.
혜정이 옥탑방으로 오겠다고 했다. 우연은 말없이 전화를 끊고 큰 우산 하나를 든 채 혜정을 마중 나갈 준비를 했다. 뭔가 큰일이 생긴 것 같았다. 우연은 혜정이 이 정도로 떨면서 말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괜시리 겁이 났다. 혜정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우연은 혜정이 내리는 버스 정류장으로 급히 뛰었다. 얼마 있지 않아 혜정이 짐가방을 든 채 버스에서 내렸다.
우연은 혜정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우산을 씌워주고 짐가방을 같이 들어주었다. 혜정은 낡고 지친 안색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봐도 당연할 것 같았다.
야식 먹을래?
우연이 짐가방을 풀어놓고 있는 혜정에게 말했다.
아까 술 먹은 뒤로 아무것도 안 먹었을 거 아냐.
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정은 말이 없었다. 꼭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문 채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 혜정에게 말을 걸기란 우연도 어려운 것이었다. 아무리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라고 해도, 서로가 서로의 집안 사정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상처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는 구원할 사람이 저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연도 잘 알았다. 자기 자신은 스스로가 구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연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래서 더 이상 혜정에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느새 혜정은 바닥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우연은 곧 정적을 깨뜨렸다.
옥상으로 갈까. 바람이라도 쐬자.
그래, 그러자.
우연이 옥상으로 가는 문을 열자 밝은 어둠이 나타났다. 바람이 흩날렸다. 정적만이 그들의 사이에서 울었다.
아무도 우리를 구원해줄 수 없어. 우리를 구원할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야.
우리는 발화의 주체를 알 수 없다. 우리의 정신에는 사자가 필요 없다. 모든 가치는 이미 구현되어 있다.
혜정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것은 최초의 발언, 어쩌면 동산 위에서 뛰어놀던 시절의 벌거벗은 최초의 고백.
돌아가자, 우리가 태어난 곳으로.
물이 있는 곳 말이야. 파도가 기어 들어가던 곳 말고. 애초에 물이 있던 곳. 이를 테면 바다.
우연은 혜정의 말을 속으로 이었다. 혜정은 방황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교회 사람들이 붙인 방황이 어느새 그들의 삶이 됐다. 처음부터 선택지 없이 결정됐던 종교가 사라지자 그들의 삶에는 믿음이 함께 스러졌다. 그 뒤에는 존재 가치였으며, 존재 이유가 함께 흐려졌다.
언제나 갈망했어. 나처럼 심지를 잃고 녹아내리는 사람을 찾고 싶었지.
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로 가야 했다. 바다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물이 있는 곳. 고이지 않고 처음부터 처음까지 물이 흐르는 곳. 어쩌면 처음이 없는 곳.
비가 섬뜩하게 내렸다. 어딘가에서는 고인 물웅덩이 위에 빗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공기 중에서 습기가 팔에 달라붙어 피부는 끈적했다. 습기가 있는 날에는 언제나 숨을 쉬기 어렵다. 꼭 홀로 서야 할 처음을 잊었던 것처럼.
바다에 가자,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비가 습하게 내려서 질식할 것 같은 장마에. 우리의 생일을 장마로 하자. 괜찮을까?
우연은 지붕 밖으로 나아갔다. 비를 맞았다. 흰 옷이 젖어 피부가 비쳤다. 날 것을 만나러 온 것처럼 빗물이 투명한 피부에 달라붙었다. 꼭 바닷속에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