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스러운 아이가 아닌 너의 나이로 살아라
알코올 중독에 관한 글 1
병원 근무할 때 지인 중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가장 먼저 나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엔 어디가 아픈데 어떤 과를 가야 하는지?
검사나 수술로 보호자가 필요한데 와 줄 수 있는지?
가끔은 부모님이나 시어머니의 지인이 입원하기라도 하면 아는 척이라도 좀 해달라는 전화도 왔다. 일종의 인사치레였다. 본인들이 가도 될 일이었지만 속마음은 우리 아이가 그 병원에 일하고 있으니 자랑하고 싶어 하는 부모의 속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병원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이 있긴 했지만 가끔씩 그런 것들이 짐이 되기도 했다. 대부분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충일 것이다. 좋은 일도 아닌, 아픈 사람의 짐을 함께 짊어지는 일.
아마 의료인의 숙명이 아닐까?
가끔 간경화 환자나 보호자를 보면 감정이입이 많이 된다.
어릴 때 우리 집은 조부모님과 사는 3대 가족이었다.
30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할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셨고, 가끔씩 어린 우리 자매들에게 술이나 담배 심부름을 시키셨다. 10살 무렵쯤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왕복 한 시간 이상을 걸어가 담배를 사 오기도 했다. 지금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엄연히 아동학대라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엔 그런 개념조차 있지 않았다. 어른들의 말이라면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 사회 통념이었고, 미덕이었다.
하루는 할아버지와 산에 있는 외갓집에 갔다. 그날도 외할아버지와 술을 드시고 날이 어두워져서야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산길을 내려오다 할아버지가 돌부리에 부딪히면서 넘어지셨다.
순간 정신을 잃으셨고 그 당시 저녁 어둠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산속에서 울기만 했던 것 같다. 이마엔 검붉은 피가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면이다. 그 뒤엔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이마에 돌부리의 선명한 자국이 남았다.
단편적인 기억들이 있지만 할아버지는 그 사건 이후로도 술과 담배를 끊지 않으셨다. 대부분 시골 남자들은 고된 농사일로 힘듦을 잊고자 중간중간 술을 드셨다. 결국엔 알코올 중독에서 간경화까지 진행됐고 술을 드시는 날이면 아니 술을 드시지 않은 날에도 집안 공기가 무거웠다.
매일 술을 드셨던 할아버지는 술주정을 심하게 하셨고, 상을 엎어 버린다거나 물건들이 날아오기도 했다. 그럴 땐 가족 모두 그 자리를 피하거나 아니면 상황이 끝날 때까지 정면으로 부딪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때 나는 정면으로 저항했다. (지금도 불의를 보거나 비슷한 상황에서는 욱하고 불덩이가 치밀기도 한다. )
수년이 그런 생활이 반복됐고, 가족들은 점차 웃음을 잃어갔다.
술로 인해 간은 그 기능이 마비되기까지 아무런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심한 변비로 피마자 열매의 기름을 드신 것이 화근이 되어 혈변을 보게 되었다. 피를 토하고, 의식이 없어 허공에 괴성을 지르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간경화라는 병 때문에 생긴 증상이라는 것을 병원에 가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 했다. 이미 간성혼수, 황달, 식도 정맥류 , 복수까지 찬 상황이었다. 시한부 진단을 받고 집에 온 할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큰 짐이었다.
아픈 어른을 모시고 함께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린 내가 보는 부모님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농사일만 하셨다.
7남매 중 장남으로 8명의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부모님은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오직 일만 했다. 저녁이면 지쳤고, 할아버지의 병간호까지 고된 하루였다. 그렇게 일상이 반복됐고 우리 가족은 그 흔한 가족 여행조차 한번 다녀오지 못했다.
주말이면 삼촌들과 고모들이 다녀갔다.
병원 간호사였던 고모는 간간히 알부민 주사를 처방받아 주사를 놓았다.
그 덕이였을까? 얼마 못 살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과는 달리 그 후로 오랫동안 할아버지는 생명의 끈을 붙잡고 계셨다. 상태가 호전되어 일상생활을 하셨다. 그러다 다시 간성 혼수가 오고 의식을 잃고, 대소변을 누어서 보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3~4학년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밭에 일하러 간 사이면 누군가는 할아버지를 간호해야 했다.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 할아버지의 대소변을 치워야 했다.
식사를 챙겨드렸다. 가끔씩 목욕을 시키는 일도 내 일이 되어버렸다.
‘내가 해드리지 않으면 부모님이 힘들 거야’
어린 나이었지만 그 생각이 가장 컸다.
술로 인해 변해버린 할아버지는 가족들에겐 고통의 존재였다. 수년간의 병시중은 가족들을 지치게 했다.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했기 때문에 간호하면서 행복한 기억이 없었다.
너무 아이 때의 기억이라 선명하지 않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아침을 기억한다
슬픔보다는 미움, 원망, 상처, 고통. 이제 끝났구나 싶었다.
돌아가신 이후에도 몇 달 동안 할아버지의 위폐를 방에 모시고 제사상을 차리고 절을 했다. 밥 먹기 전 매일 같은 시간에 상을 차리고 절을 하는 의식이 끝나야 비로소 가족들이 식사를 했다. 부모님이 늦게 까지 일하는 날이면 그 담당이 나였다. 몇 달이 흘러 탈상을 하고 나서야 정말 족쇄 같은 짐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할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면서 간호사 길로 들어섰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하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간호사를 하면서 알았다. 나는 술 먹는 환자, 간경화 환자를 볼 때마다 그때 기억이 떠올라 아직도 힘들어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 간호를 하면서 피를 무서워한다는 것도 간호사가 된 후 한참을 지나서 알게 되었다. 지금도 아이들이 다쳐 어딘가 피가 흐르면 내가 간호사였다는 것을 잊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두운 산에서 내려오다 할아버지가 넘어져 얼굴에 피가 줄줄 흘렀던 기억, 간경화 말기로 자주 식도 출혈이나 혈변을 봐서 놀랐던 기억이 무의식 중에는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또 그때의 기억이 올라오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려 한다.
그리고 너무 어린 나이에 큰 짐을 짊어진 그때의 나에게 돌아가 이야기해준다.
‘ 네가 많이 힘들었구나. 얼마나 많이 힘드니. 이제는 너의 인생을 살아
착한 아이가 아닌 아이다운 너다운 삶을 살아 ‘
칭찬이 아닌 위로를 건네준다.
우리나라는 유독 효 사상을 중시하며 자녀들에게 어른스러운 아이, 착한 아이를 강요한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답게 어른은 어른답게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몫을 해 나갈 때 진정한 행복이 온다. 내 주변엔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타인의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이 유독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간호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남을 간호하는 사람의 운명.
최근 간호 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이 말은 꼭 해준다.
“ 요양 보호사, 조무사를 준비하는 여러분. 누구보다 남을 먼저 위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일 거예요. 그러나 너무 큰 짐을 지지는 마세요.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하고 내가 단단할 때 남을 간호 할 수 있어요”
어느 날 시어머니가 7살 둘째에게
“ 이제 다 컸는데 어른스럽게 행동해야지, 아직도 애기 같이 굴어!!?”
하며 사소한 일로 야단치고 계셨다. 그때 아이의 표정에서 어릴 적 나를 봤다.
“아이는 아이 자리에서 해맑게, 아이처럼 행동하는 게 아이예요.!!”
발끈하며 그 상황을 종료시켰다. 어머니에겐 저항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내 아이는 어른스러운 삶이 아닌 7살 여자 아이, 9살 장난꾸러기 아들로.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길 바란다. 이제는 나 자신 또한 남에게 강요받았던 착한 아이가 아닌 39살 내 나이로 지금을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