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삼불고기를 맛있게 먹다 오래전 인공신장실(투석실)에서 만난 기봉씨가 문득 떠올랐다. 그는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가 환생한 듯 우람한 풍채와 바람에 날리는 검은 눈썹, 황소 같은 둥그런 눈과, 천둥 같은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130kg이 넘는 거구의 그는 의족을 하고 매주 3회 (화목토) 똑같은 시간에 인공신장실로 들어왔다. 체중을 제고는 준비해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꺼냈다. 간호사 스테이션에 와서는 반찬통을 쓰윽 내밀고 자기 침대로 향한다. 하루는 오삼불고기, 하루는 겉절이 , 그다음은 김치를.... 인정 많은 그는 빈손으로 들어오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우리 이런 거 안 먹어도 돼요. 힘든데 그냥 와요”
괜찮다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매일 투석 날이 되면 새벽부터 근처 시장에 가서 재료를 사고 손질해서 반찬을 만들어 왔다. 안 받는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찬을 두고는 침대로 올라갔다.
그는 나보다 10살 정도 많았다. 젊었을 때부터 어머니와 식당을 운영했다. 남에게 먹이는 것을 좋아해 매번 반찬을 해서 가지고 왔을 것이다.
처음 그를 알게 된 것은 정형외과 병동 근무 때였다. 평소 당뇨병이 있던 그는 왼쪽 발에 작은 상처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당뇨로 감각도 둔했고, 혈액 순환도 제대로 되지 않자 한 달 두 달 치료를 해도 호전이 없었다. 결국 상처는 낫지 않고 괴사까지 되자 무릎 아래까지 절단하고 의족을 하게 되었다. 무단히도 그는 다리만은 살리길 원했지만 당뇨란 지독한 놈은 결국 그의 다리를 뺏어 갔다. 그가 몸을 의족에 적응하기도 전에 신부전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신부전이 무엇인지 앞으로 펼쳐진 고통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많은 투석환자들이 우울증을 갖고 있다. 투석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사망 선고와 같다.
환자의 건강 상태, 신장 기능의 잔존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들에게 출구는 하나밖에 없었다. 신장 이식을 통해 정상이 되는 것. 하지만 이식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 보니 신부전 환자들은 대부분 투석을 받고 살아간다. 내가 일했던 인공신장일은 급성신부전을 제외하고 대부분 환자들이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거의 20년째 투석을 받고 있었다.
투석 환자들의 일과는 매일 같았다.
병원으로 들어서면 인사와 동시 체중계에 올라 몸무게를 잰다. 환자의 컨디션, X-ray, 검사 결과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건체중이라는 것이 환자마다 정해진다. 지난 투석 이후 늘어난 수분과 노폐물의 양을 더해 투석하면서 그만큼 체중을 줄인다. 대부분 3kg 정도 빼는데 4kg을 넘지 않는다.
투석환자 중에도 절제를 잘하고, 식이조절도 잘하면 체중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젊어서 진단받은 남자 환자들 중 몇은 술을 먹기도 했다. 식이 조절을 하지 않아 며칠 사이 5kg 이상 몸무게가 불어왔다. 투석 환자들은 소변으로 수분이 배출되지 않고 노폐물이 그대로 몸에 쌓이게 된다. 그러면서 심장에 무리가 온다. 또 혈액 내 칼륨이라는 전해질이 높아지면 심정지라는 무서운 위험을 안고 산다.
물도 먹지 못해 갈증이 나면 얼음이나 사탕을 먹었다. 과일이나 채소는 칼륨이 높아지면 심장마비의 위험이 올라가기 때문에 절대 생 채소를 먹지 않게 한다. 꼭 삶거나 물에 오랫동안 담가 먹어야 한다.
일상생활 또한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주 2~3회 그들은 매번 일정한 시간에 병원에서 준비한 차에 탄다.
병원에 와서 체중을 제면 정해진 침대에 가서 눕는다. 한 여름에도 투석을 받다 보면 오한을 느끼기 때문에 간호사들은 약한 정도로 전기장판을 미리 틀어 놓았다.
팔의 옷을 올리고 생명줄과도 같은 동정맥루( 투석을 위해 팔의 정맥과 동맥을 연결하여 굵은 혈관을 만든 것)를 만져본다. 수십 년 투석을 하다 보면 혈관이 마치 구불구불 기어가는 뱀 같아 처음 본 사람들은 크게 놀라곤 한다. 그 혈관에 마치 전기가 흐르듯 털이 삐죽 설 정도로 스릴이 느껴지면 안심하고 소독과 동시에 굵은 바늘 2개를 혈관에 꼽는다. 긴 라인이 걸리고 기계가 작동되면 환자들은 꼼짝없이 4시간 동안 침대에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이어폰을 꼽고 TV를 시청한다.
처음 투석실에서 일할 때 나는 커다란 기계에 혈액이 들어왔다 필터를 거쳐 환자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한 달 두 달 세 달. 그렇게 시간이 지나도 두근거림은 없어지지 않았다. 피에 대해 공포가 있다는 것을 13년 차 간호사로 인공신장실에서 근무하며 알게 되었다. 간호사도 그런데 수년 째 투석을 받는 환자들은 어땠을까?
장기 환자들 사이에서 기봉씨는 투석 시작한 지 1년이 안되었다. 처음엔 목 쪽 혈관에 카테터를 넣어 투석을 하고 혈관 전문 병원에 가서 왼쪽 팔에 동정맥류 시술을 했다. 혈관이 잘 자라 사용한 지 몇 달 되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간호사 스테이션 바로 앞이었다. 간호사와 가까이 있다 보니 인력이 부족해 식당에 가지 못하고 투석실에서 식사를 하는 간호사를 안쓰러워했다. 반찬이 부실한 날은
이래서 간호사들이 일하겠냐면서 어느 순간부터 반찬을 해 나르기 시작한 것이다.
뭉툭한 그의 손과는 달리 음식은 대부분 양념을 아끼지 않고 듬뿍 넣어 그런지 맛이 좋았다. 투석하는 중에 식사를 하는 간호사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 이야 기봉씨 손맛이 끝내줘요. 너무 맛있어요.”
하면 피식 웃으면서 수갑처럼 자신을 묶은 투석기와 바늘의 고통을 잊는 듯했다. 그리고 다음 메뉴를 생각하느라 지루할 세가 없었다.
그에게 삶은 절망의 연속이었지만 주 3회 투석을 하면서 간호사들이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어 주는 것이 행복이고 삶의 낙이었다. 그리고 엄지 척은 자신에 대한 인정이었다.
그가 투석을 팔에 시작한 지 3~4개월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몸의 상태가 좋아지기보단 매번 들어올 때마다 힘든 기색이 영력 해졌다.
어느 날부턴가 휠체어를 혼자 밀고 오기 힘들어했고, 투석 때마다 숨이 차다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투석하다 식은땀도 많이 났고, 가슴 조임이 심해졌다.
작은 병원이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는 해 줄 수 있을게 크게 없었다.
보호자는 간간히 상태가 안 좋아지면 연락하는 남동생이 있었다. 둘이 상의해서 큰 병원에 가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기봉씨는 여기가 더 좋다 하고 고집을 꺽지 않았다.
그 상황이 세내 번 지속되면서 기봉 씨는 더 이상 장을 보고, 반찬을 만들지 못했다.
얼굴에도 그늘이 졌고, 매번 자신의 즐거움이었던 요리를 못하자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날 토요일은 유독 기봉씨가 힘들어했다. 투석 2시간이 지날 무렵부터 식은땀도 많이 났고 혈압도 들쑥날쑥했다. 가슴 통증도 심해져 결국엔 투석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급히 동생에게 연락을 하고, 큰 병원에 갈 것을 권유했다.
“ 기봉씨 며칠 치료받고 컨디션 좋아지면 다시 와요 ”
끝까지 가지 않으려는 기봉씨를 동생과 함께 인근 병원으로 보냈다.
매일 7시 20분이면 자동문을 열고 반찬을 만들어 휠체어로 들어오던 그가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며칠 후 환자들이 투석하러 들어오며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 기봉씨가 며칠 전에 죽었다지? 어휴.”
순간 눈물이 핑 돌고 목이 메었다. 그렇게 투석하는 환자들은 예고도 없이 커다란 빈자리를 남기고 갈 때가 있었다.
매번 삶의 희망이 없다는 다른 투석 환자들과는 달리 몇 달 사이 다리도 잃고, 신장도 잃고, 좋아하는 식당일도 잃었지만 간호사들에게 맛있는 반찬을 해주면서 삶의 낙을 찾던 기봉 씨였다. 갑작스럽게 환자들이 떠났을 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후배와 병원 점심 메뉴로 나온 오삼불고기를 먹다 보면 기봉씨가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성치 않는 다리로 시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면서, 반찬을 만들었을 기봉씨. 좀 더 고맙다고 이야기해줄걸. 그냥 간호사들에게 반찬 해주면 거절하지 말고 잘 먹어 줄걸.. 그렇게 후회하는 것이다. 며칠 전 문득 시어머니가 해준 오삼불고기 맛에서 오래전 기봉씨가 떠 올랐다. 인정 많았던 그가 이제는 하늘에서 정말 삼국지의 장비처럼 건강하고 아프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환자의 이름은 가명으로 기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