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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민 May 22. 2024

감각의 조건

디아스포라 영화제를 다녀오다

나들이를 나가지 않으면 조금 아쉬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햇볕이 따스하고 바람이 살랑이니, 사람들의 옷차림새는 점점 가볍게 변한다. 서울 곳곳에서는 공연이나 전시, 축제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과 행사가 열린다. 나는 소파에 몸을 눕히고 슬쩍 sns를 살핀다. 사람들의 일상 사이사이에 치고 들어오는 문화 행사 관련 광고를 제법 많이 만난다. 몇 년 전부터 얘기되던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오프라인에 사람들이 모이고 함께 호흡하고 교류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다만 코로나 시대를 지나고 형성된 어떤 감각은 여전히 사람들 뇌리와 신체에 새겨져 있을 테다.


이렇듯 일상에 자유로운 조건이 만들어지고 즐길거리가 쏟아지는 판국이니 왠지 집에만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든 나가서 좋은 구경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인천에서 열리는 디아스포라 영화제 소식을 접하게 됐다. 올해 12회를 맞는 디아스포라 영화제는 인천 아트플랫폼과 애관극장을 중심으로 '디아스포라적' 미학과 메시지를 경유하는 영화를 관객에게 선보이고 있었다.


디아스포라 영화제 홈페이지 링크



나의 영화제 경험은 2019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서울에서 남해로 이주하고 지역문화진흥원 지원사업에 선정되어서 무인도영화제라는 지역 영화 축제 기획 및 진행에 참여했다. 영화제 준비 과정 중 자문과 참조를 위해 정동진 독립영화제와 무주 산골영화제를 다녀왔고, 남해 무인도영화제 행사를 마무리하고 나서는 부산, 전주 등 매년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놀러 가곤 했다. 지금까지도 다양한 영화제 소식을 접하면서 이곳저곳을 다니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지난 시절 작은 영화제를 지역에서 열어봤던 경험 때문일까,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그 모습에 예전 내가 생각나 반갑기도 하다.


이번 디아스포라 영화제 소식 역시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상영작과 일정을 살펴봤다. 개막작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There Was Nothing Here Before>, 디아스포라의 눈 섹션 중 <조이랜드 Joyland> 그리고 라운드 테이블 프로그램 <지금 여기, 떠도는 영화의 노에마 (noema) Part 2>에 관심이 생겼고, 이 모든 상영작과 프로그램 관람을 위해 개막일 5월 17일과 19일 이틀을 인천에 다녀왔다.


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에게 영화제는 가는 길부터 시작해서 돌아오기까지 행복한 순간들의 연속이 아닐까. 나는 영화 전문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기꺼이 즐기는 사람으로서 이번 디아스포라 영화제 역시 그 첫 만남이 인상 깊었다.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작품을 관람하고, GV, 강연, 포럼 등 영화 담론으로 이어지는 대화 역시 즐거웠다. 영화제를 즐기다 보면 영화를 중심으로 이곳저곳 몸을 움직이고, 자연스레 그 동네와 지역 문화를 접하는 이점도 생긴다. 평소 인천에 방문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을 중심으로 한중일의 시각문화를 교차하며 산책하는 시간은 인천이라는 장소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됐다. 


영화제마다 지니고 있는 테마나 메시지를 프로그래밍과 작품 그리고 지역 현장을 경유하여 만나는 순간이 생긴다. 이 순간이 영화제를 준비하는 이들이 바라는 모습 하나가 아닐까.


개막 축하공연 중인 장기하 님과 수어통역사 님 화면



영화제를 다녀오고서 나흘이 지났을까 생활 중간중간 디아스포라의 조건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민족의 영역에서 이해되는 '역사적 디아스포라'와 더불어서 개인적인 차원으로 느껴지는 '감각의 디아스포라'를 생각하게 된다.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이 미시적인 차원으로 축소되며 나의 일상을 해석하게 되는 추상의 필터가 만들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지금까지 열두 번의 이사를 했다. 15년간 여행이 아니라 거주하는 장소로서 열 곳이 넘는 집과 동네에 머물고 또 새로운 곳으로 떠난 것이다. 나의 세월 안에서 이 장소들은 디아스포라적으로 어떻게 재구성될까. 내 이동의 역사와 디아스포라 개념의 교집합을 만드는 시도를 해보게 된다.


재작년 즈음에 대학로 예술청(현 서울예술인지원센터)에서 열렸던 작은 포럼에 다녀온 적이 있다. 패널로 발언하던 한 젊은 작가가 '페어링'이라는 개념이 본인의 작업에서 어떤 맥락인지 설명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때 설명을 되짚어보면, 블루투스 기능으로 스마트폰과 이어폰이 한 번 페어링 되면 이후에 자동으로 연결이 되듯이, 작업의 주체들이 한 번 연결(페어링)되고 나면 매우 쉽게 2차, 3차로 다음의 연결을 만들어 낸다는 이야기로 기억한다. (당시 설명의 맥락은 다를 수 있지만 나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내가 머물렀던 장소들은 전부 나와 페어링 됐다. 이 과거의 연결이 내 DNA에 새겨졌다. 언제든 다시 그곳에 갔을 때 기다렸다는 듯 바로 연결될 것이다. 어렵지 않은 재연결이 내 기억과 마음속 안에 어떤 공명을 만들어 주지 않을까. 마치 학창 시절 다니던 초등학교를 성인이 되어서 방문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다시 찾는 모교에서는 자연스레 그때 그 시절 기억의 공명이 울리게 된다.


내가 앞으로 머물 장소와의 낯선 첫 연결 그리고 과거에 머물던 곳에서의 익숙한 연결, 이렇게 낯선 때로는 익숙한 장소와의 연결이 삶 안에서 계속해서 연쇄 작용을 일으키고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 곳에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다시 밀려오고 쓸려나가는 이런 거대한 힘의 흐름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가 만들어진다. 디아스포라는 이런 의지로 구원받은 개인들의 전사(前史)인지 모른다.




※ 이 글은 독립 출판사 '우리가 소멸하는 방법'(@thewaywesomyeol)의 프로젝트 <하작가의 서류뭉치>와 연계하여 연재하는 에세이입니다. 

※ <하작가의 서류뭉치>는 매월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주문한 독자에게 우편으로 발송하는 단편소설 직거래 프로젝트입니다. 아래 링크에서 '서류뭉치' 주문 및 작품 목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하작가의 서류뭉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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