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이 작당을 하더니 어느 날 “진패양난 미련사드”라는 말이 들려왔다. 소성리마을회관 에는 새로운 얼굴이 등장했고, 사진가들과 다큐감독, 엔터테인먼트 정가수를 비롯해서 화담선생님까지 사드반대투쟁에 예술적인 투혼으로 연대해왔던 이들이다. 그 분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나는 멋도 모르고, 화담선생님께 작품을 내어주실 수 있는지 물었다. 화담선생님은 늘 그렇듯이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막상 전시회 장소를 마을회관 2층 옥상으로 결정되고, 사람들은 전시공간을 만드는 작업이 한창일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소성리에 올라가는 날 화담선생님과 시중선생님이 와 계셨고,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손볼 일들이 많았을텐데 나는 일을 거들지 못했다.
아주아주 추운 날에 전시를 준비했었다. 마침 에리카씨가 소성리에 머물면서 무진장 고생을 했다는 소식을 늦게 전해들었다. 나는 들락날락 거리면서도 그곳의 일에 무심했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평화장터의 매출을 올릴 생각으로 가득차 다른 것들은 내 시선을 끌지 못했다.
내 차량트렁크에는 평화장터에의 물품으로 가득 실려있었고, 나는 내 차량의 물품을 어떻게 하면 빼낼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해야했다. 그리고 또 어떤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을까를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야했다.
‘미련사드’ 기획자인 김대표가 서예예술가 화담선생님이 써 준 ‘그래도 뚜벅뚜벅’ 글씨체가 너무 이뻐서 살리고 싶어했다. 소비하고 싶어했다. 잘 소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소비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뚜벅뚜벅’ 사드 뽑는 길에 함께 갈 수 있도록 글씨가 읽혀지기를 바랐다. 글씨를 볼 때마다 사드를 뽑을 때까지를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을거다.
김대표는 ‘그래도 뚜벅뚜벅‘ 실크스크린을 만들어 사람들과 손작업을 시작했다. 손수건을 만들고, 에코백을 만들었다. 그리고 토요촛불문화제가 있는 날에 내 옆자리에 판을 깔아 펼쳤다.
’미련사드‘ 전시회를 하면서 괜찮은 디자인을 발굴하고, 좋은 아이템을 개발해 의미있게 알려보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내 시선을 끌었던 글씨 ‘그래도 뚜벅뚜벅’에 화담선생님의 낙관이 찍혀있었다. 저 글이 우리의 처지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뭉쿨했다. 내가 닮고 싶은 화담선생님이 사드뽑는 그날까지 내가 저렇게 뚜벅뚜벅 걸어갈 거라 믿어주시는 듯 했고, 그래야 한다고 타이르는 듯 했다. 나는 저 글씨를 우리의 이정표 삼고 싶어졌다. 내 안에서 ‘그래도 뚜벅뚜벅’을 살리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김대표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 의견을 나누다, 평화모임 하는 날, 써니와 복어 두 사람이 김대표를 도와서 실크스크린 작업을 담당하기로 했고, 작품이 완성되면 평화장터가 판매를 해보려고 했다. 여럿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다보니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실크스크린으로 물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 상징로그처럼 제작해보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옷에 글씨를 새겨서 판매할 수 있는 방법, 우기를 맞아 우산에 새겨보자는 등의 평화장터의 물품을 어떻게 만들지로 의견이 좁혀지면서 시장조사를 하게 되었다.
평화장터의 물품이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가 원한 것은 ‘그래도 뚜벅뚜벅’ 이 사드반대투쟁하는 소성리의 상징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보자는 뜻을 모았다. 사드뽑고 평화심자는 의미로서 로그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념품 같은 것에 꽂히기도 하고, 옷에 넣자고 했다가 우산을 만들자고 했다가 의견은 산으로 바다로 마구 헤엄쳐 뻗어나갔다.
결국 전문성 있는 디자이너와 의논키로 했다. 사드반대 투쟁 이전부터 내가 일을 할 때 늘 도움을 받아왔던, 자칭 나의 전속디자이너 언니와 의논을 하면서 조언을 얻고 여러 가지로 알아보았지만, 평화장터 같은 영세한 규모의 동네구멍가게가 취급할 수 있는 것이 별로 마땅치 않았다. 문제는 수량이었기 때문이다. 대량이 아니면 결국 제작자체가 비싸지고, 팔리지 않으면 재고를 떠안게 될 위험부담 등의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소성리에 꽂혀있는 사드를 뽑기 위한 우리의 활동을 알려내고, 전국의 연대자들과 동질감, 공감을 높여낼 수 있는 방법, 우리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노력, ‘그래도 뚜벅뚜벅’이 보여주는 우리의 사드뽑겠다는 의지를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다.
결국, 소성리사드철회성주주민대책위원회 이종희위원장에게 단체티를 만들고 싶다고 고백했다. 이종희위원장님은 반색을 하면 환영했지만, 대책위가 부담을 많이 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일을 내가 담당하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나는 소성리 뿐 아니라 사드를 반대하는 전국의 연대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나만의 욕심은 아니었을거다.
다행히 대책위는 잴 것도 없이 ‘그래도 뚜벅뚜벅’ 화담선생님 작품을 살려서 단체티를 만들기로 결정했고, 나는 그 일을 담당해서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평화장터가 져야 할 부담은 줄였다. 부담이 줄어드니 또 다른 욕심들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평화장터가 구색을 갖추었으면 하는 욕심. 뭔가 땟깔나게 만들고 싶은 욕심. 투쟁기금 1000만원 만들면 때려치운다고 했던 약속은 어디로 가고, 뭘 자꾸 만들고 싶은 욕구, 욕망, 이래서 자본가가 사람은 괜찮은데 자본가의 위치에 오르면 변하는 것일까? 자본가의 속성인가? 문어발씩 확장은 아니지만, 뽀대나고 싶은 건 어째야 하나?
평화장터에 설명절 장사를 잘해서 9번째 투쟁기금을 만들어 보내고, 한번만 더하면 1000만원의 목표액을 성사시키는데, 이제와서 ‘그래도 뚜벅뚜벅’ 이 탐난다고 뭔가 만드는 게 어떤 의미인가? 결국 평화장터의 목표금액을 수정하겠다는 것이 되어버렸다.
평화장터 씨링을 4000장이나 만들어서 물품마다 부치기로 했다. ‘그래도 뚜벅뚜벅’이 새겨진 비닐봉투를 1000장 제작했다. 아. 결국 평화장터는 씨링과 비닐봉투를 다 쓸 때까지는 유지해야한다.
나는 계속 장사를 하게 하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삶이 장사가 아니었건만.
2018년 3월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