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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야 Jun 26. 2018

평화장터로 생색내기. 이제 끝

진밭일기 2018년6월26일

진밭일기 2018년6월26일    

꼭 뒷북치는 사람 하나쯤 있더라. 실컷 사람들에게 소성리평화장터가 점방휴업 들어간다고 인사를 하고는 남은 재고물량 팔기는 뻘쭘하다. 소성리평화지킴이 한다고 애먹는 사람들, 돈도 없는데 물건 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모든 이들에게 다 나눔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냥 눈에 띄는 대로 대충 나눔하다 보니 거의 정리가 되어간다. 못 받아서 섭섭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건 복걸복이려니 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뒤늦은 주문 문자가 날라왔다. 멀리 인천에 사는 분인데 착실하게 주문내역과 계산서까지 보내왔다. 안타깝지만 점방문 닫는다고 말할까? 아니면 요것만 보내고 끝낼까? 그래도 수개월동안 장사를 해서인지 고객이 생겨나고 잊지 않고 연락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문을 닫을라니 아까운 마음이 살짝 치솟았다가도, 아니지 정리하기로 만천하에 알렸는데 끝내야지. 질질 끌다가 영 헤어나올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암튼 그런 얄팍한 장사속이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있었나보다. 결국 고민 끝에 평화장터의 물주였던 약초언니네가 보내드리기로 했다.     

작년 8월이었다. 소성리에 사드 4기가 추가배치 될 즈음에 위기의 소성리가 쓰러지지 않도록 평화모임을 시작했었다. 고단한 소성리할매들을 위한 치유프로그램을 고민했다. 약초언니의 주선으로 평화장터를 시작하게 되었다. 통큰 농부이자 장사꾼인 약초언니가 등 뒤에서 팍팍 밀어주니 잘되던 안되던 별로 겁날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한반도의 핫이슈 현장이다보니 사람들의 많은 관심 속에서 장사를 했고, 큰 돈을 만졌다. 

남들은 내게 장사 잘한다고 한마디씩 거들지만, 나는 아마 장사했으면 벌써 거들나고 말았을거다. 원가에 이문을 붙여서 파는데, 많이 팔릴수록 많이 남아야 하는 게 이치이건만, 원가를 맞추기가 벅찼다. 그렇다고 다른데 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소성리평화장터 덕분에 나눔하고 싶은 투쟁사업장에 마음 내키는 대로 물품후원은 실컷 했고, 평화지킴이나 연대자들에게 선심 베풀 듯이 나눔도 많이 했다. 투쟁기금 만들자고 시작한 장사이지만, 소성리평화지킴이들에게 나눔하는 것도 투쟁기금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원가 맞추기가 벅찬 이유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소성리 마을주민들에게 평화장터가 주는 의미가 있었을거란 생각한다.  

봉정할배는 집회나 문화제 때마다 점방문을 연다고 탁자위에 물건을 올리고 정돈하는 것을 볼때면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들고 내게로 다가온다. 장사를 한다는데, 저게 팔리는지 안 팔리는지, 애만 쓰는거 아닌가 싶어서 걱정도 되고, 또 투쟁기금 만들겠다고 물건을 들고 이리저리 쫓아다니는 걸 보니 기도 막히고, 대견하기도 하다고, 그래서 뭔가 하나라도 사줘야겠다고 만원짜리를 꺼내들고 내 앞에서 서 있을 때가 한번씩 있었다. 

소성리엄니들은 처음엔 뭔지 잘 이해하기 어려웠을테고, 막상 사려고 봐도 살만한 것이 없었을테고, 그래도 소성리평화장터에 물건하나 사줘야지 하는 마음에 구절초조청이 나왔을 때는 너도나도 한병씩 의무적으로 사기도 했었다. 엄니들끼리 의논을 한 모양이다. 그래도 하나는 사줘야지 하는 목소리가 눈에 선하다. 

그리고 돈을 벌어서 백만원을 투쟁기금 넣었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누구보다 기뻐했던 엄니들의 환한 웃음이 나도 즐거웠다. 자신이 쓰는 돈도 아닌데 말이다. 

집회장소에서만 전을 펴서는 매출이 늘지 않는 시점부터 ‘성주 안전한 먹거리 밴드’에 살짝 고개를 내밀기도 했었다. 나를 알아보는 수 많은 성주사람들의 반응이 사실 두려웠다. 마주치지 않으면 매출을 높일 방법이 묘연하니 도전해 봐야했다. 다행히 사람들은 동정하지도 않았고, 차갑지도 않았다. 관심 가질만한 물건이 나타나면 반응했고, 선호도에 따라서 꾸준히 이용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실 경옥고는 성주의 한분이 거의 다 팔아주셨다. 참 신기할 정도다.  


여러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 명가복어사장님은 좋은 성격이라기 보단 신념이 분명한 사람인거다. 사드반대하는 자신의 신념대로 우리 소성리평화장터의 물품을 자신의 가게에서 교환할 수 있도록 내어주었다. 공무원들이 많이 이용하는 식당이라 눈치보일만도 했지만, 그는 그런 건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념대로 살겠다는 확고부동한 자세가 있었다. 

하루는 동창씨(예전 1기 성주투쟁위에서 사무국장했던 이인데, 사드를 소성리로 보내는데 찬성했던 인물이다)가 약초소금세트를 보고는 누가 취급하는거냐고 물었단다. 명가사장님이 “손소희씨가 하는 겁니다” 하고 말하니까 툭 내팽개치고 나가버리더란다. 

나름 나도 성주에선 꽤 유명한 인사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명가사장님도 알바자리에 나를 좀 쓰면 안되겠냐는 청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유인즉슨 내가 식당에서 일하는 순간, 이곳은 주로 공무원이나 경찰들이 많이 이용하는데, 그들이 문을 열었다가 내 모습을 보면 돌아나갈게 뻔하다는거다.  음.. 사드반대라고 하지만 가게 망하게 해선 안될 일이다.   

명절 때만 되면 이석주 이장님과 이종희위원장 등살을 빡빡 긁었다. 두 위원장님이 소성리평화장터 매상 올려주겠다고 여러 번 큰 장사를 도와주었다. 거기다 내 등쌀에 못 이겨 송아찌도 명절선물 팔아주기에 동참해주었다. 뭐 그렇게 상부상조하면서 겨우 유지해온 셈이다. 

놀라운건 정복샘의 영업력이었다. 조용하지만 지치지 않고 꾸준히 자리를 지켜왔던 정복샘이 명절선물을 팔아준 실적이 과히 놀라울 수준이었다. 연주언니도 소리없이 강한 ‘내감자’였다.  숨은인재들이 있었다.     


소성리부녀회장님의 손두부는 감동이었다.  

아마 처음 평화장터를 시작했을 때는 사람들은 지켜봤던 거 같다. 수육약초를 포장하기 위해서 소성리평화모임에서 공동작업을 하던 날이었다. 여러차례 함께 모여서 공동작업 하고, 판매하고, 수익금을 만들면서 나름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이런 자리에 소성리엄니들도 함께 하면 좋겠다 싶어 부녀회장님과 태환언니를 모셔갔다. 약초언니는 정성스럽게  밥상도 차려주고,  황토방에서 뜨끈하게 허리를 지질 수 있도록 준비해주었다. 그리고 약초작업을 다 하고 나서 우리가 만든 수익금을 어떻게 쓸건지 의논을 했었다. 지금까지 소성리투쟁하는 성주주민대책위에만 투쟁기금을 보냈는데, 다음부터는 우리와 함께 연대하고 있는 김천시민대책위, 원불교비대위, 상황실 등 연대단위도 차례차례 투쟁기금을 보내자고 의논을 지었다. 이런 장면을 본 부녀회장님이 감동이 컸었나보다. 당신도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투쟁기금을 만들만한 뭔가를 해주고 싶었나보다. 

그리고 며칠 후 부녀회장님이 손두부를 만들어주겠다고 발표했다. 다른 건 필요없고, 콩값만 달라는 거다. 하루 종일 밭일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와서는 몇 년동안 손을 놓았던 손두부를 만든다고 하니 마을이 들썩 거렸다. 촛불하는 날 밤에 연대자들 먼저 팔아야 한다고 해서 마을사람들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 바람에 부녀회장님은 다음날도 손두부를 만들어서 마을사람들에게 팔아야 했다. 그만큼 소성리 임순분부녀회장님 손두부는 아주 유명했다. 

그러다 설명절도 다가와서 몇 번을 더 손두부를 만들게 되고는 부녀회장님은 다시는 손두부 안 만들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손두부는 정말 맛있었다. 지금까지 먹어본 손두부들이 정말 손두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고소하다. 일단 약품처리 하지 않고 전통방식으로 만든 손두부이니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 고소한 맛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 때쯤 나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심각하진 않았지만, 내 미래를 설계하면서 업으로 할 만한 일로 손두부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을까하는 고민을 한참 했다. 부녀회장님께 악착같이 졸라서 배우면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문제는 내가 지긋이 하겠냐는거다. 공상은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겨울 밤의 꿈으로 끝나버렸다.   

 

늘 뭘 팔까를 유심히 보는 건 아닌데, 눈에 띄는게 하나씩 있더라. 호두나무도마가 그랬다. 사실은 팔려고 얘기 했던 게 아니라, 내가 하나 가지고 싶었던 건데, 어쩌다보니 목수는 호두나무도마를 들고 소성리로 왔고, 나는 선 듯 받아들었다. 평화모임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호두나무가 생소했고, 생협에서 취급하는 도마가 주로 소나무인데, 가격대가 싼 편이었으니, 호두나무 수공예품의 가격은 취급하기 어렵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던거다. 

다행히 목수는 어려운 문제를 쉽게 정리해주셨다. 그리고 생각 외로 호두나무 도마가 수공예품이다 보니 관심이 적지 않았다. 아마도 가격대가 시중보다 크게 높지 않았고, 그야말로 수공예품이다 보니 똑같은 물건이 없었다. 내 것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귀한 물건으로 취급해주었다. 

그쯤 내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신청을 했던 것을 부활시켰다. 아주 오래전에 했던 건데 워낙 긴 시간을 휴면처리 했던거라서 말이다. 오마이에 글을 올리기 시작할 때 호두나무도마에 관한 에피소드와 진한 이야기를 올렸더니 이게 기사로 채택이 된거다. 기사를 보고 호두나무 도마를 구매하고 싶다는 문의가 빗발쳤다. 목수는 다른주문으로 가구를 하나 제작해야 한다면서 울상이 되었고, 나는 주문이 많아서 해맑은 미소로 가득했다. 

이런 에피소드도 나름 재미있다. 그때 오마이뉴스의 위력을 느꼈다. 전혀 뜻하지 않는 곳에서 뻥 터졌으니 말이다. 그렇게 호두나무 도마는 여러차례 제작되고 판매되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보니 정작 내 꺼는 없다. 빨리 하나 만들어달라고 목수한테 떼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있는 소성리평화장터의 이야기들이 다 날라가버릴까봐 장황하게 늘어졌다. 

진상고객 한번 만나보지 못한건 복이다. 좌충우돌하면서 실수해도 따시게 봐준 고객님들이었다. 

나는 장사하는 게 가장 질색이지만, 처해진 상황이 나를 장사하게 만들었고, 나는 기꺼이 감내해야했다. 나는 내가 장사를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 한 번도 없지만, 주변에서는 능력있다고들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건 나의 능력이 아니다. 상황이 만들어준 능력이지. 사드가 만들어준 환경에서 가능한 능력 말이다. 

날이 더워지면 물품을 보관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우리에겐 저장창고나 저온창고가 없다보니 보관 문제가 젤 곤욕스러운 때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름에는 반팔티셔츠를 판매해야겠다는 계획도 있었지만, 다행인지 반팔티셔츠는 좀 빠르게 정리가 된 편이었다. 여름을 날만한 뭔가가 부족한 가운데, 고추장은 시큼한 맛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가 더 이상 장사를 하고 싶지않다. 장사는 내 자리가 아니니까. 나는 내 자리를 찾고 싶어졌다. 그리고 매출이 오를 가망도 점점 희박해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정리해야 할 때가 된 듯하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는데, 잘 한다고 이야기 들을 때 깔끔하게 한판 정리하고 싶었다. 다음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그렇게 소성리평화장터 1막을 내린다. 그래도 점방폐업이 아니라 휴업이라고 했다.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니 또다시 소성리에 위기가 찾아온다면 우리는 위기를 극북하기 위해서 또다시 힘을 모을 것이다. 

소성리평화모임은 여전히 살아있을테고, 성주주민인 평화모임 여인들은 사드를 물리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해내고 있을거다. 

우리는 결코 이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먼저 투항하는 법을 모른다. 

소성리평화모임이 위대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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