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영은 작가가 되기 위해 김서철의 문하생으로 어렵사리 들어갔다.
글을 배우던 중 그에게 원고를 제출해 검토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김서철은 현영의 글에 대해 혹평을 쏟아내며 현영을 몰아세웠다.
그런데 얼마 뒤, 현영이 썼던 글이 제목과 문체만 살짝 바뀌어 ‘김서철의 새 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자신이 쓴 글인 것처럼 으스대며 인터뷰까지 마친 모습이 가관이었다.
작가로서 제 작품을 빼앗긴 기분이 어떤지는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알지 못할 것이었다.
현영은 당연히 김서철에게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김서철의 문하생에서 잘릴 뿐 그녀가 원하던 상황이나 보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분노에 찬 현영은 자신과 같은 문하생으로 있던 ‘이상정’의 집에 소설을 명목으로 방문했다.
상정이 총기 소지자임을 밝혔던 터라 총을 훔치고 나와 김서철의 집 앞까지 곧장 갔을 것이다.
하지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사람을 죽이기는커녕 총 한 자루 제대로 잡아본 적 없던 현영이 단박에 죽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청부살인은 했던 거라고?”
지훈이 제인에게 물었다.
“이건 이상정씨의 증언 내용.”
핸드폰에서 나오는 녹취엔 제인이 말했던 것을 포함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비웃음 섞인 제인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현장에서 전화를 건 이가 상정이라는 것이다.
상정이 현영이 나간 후 총이 없어졌다고 증언한 것이 조사실에 울리자, 현영은 새파랗게 질렸다.
“실력 좋은 업자 하나 써서 일부러 급소를 피해 맞춰달라고 했고 업자는 돈 받고 증거 하나 없이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고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갔지.”
제인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곧바로 당신이 왔고 죽어가는 김서철을 구경하고 있었을 거고. 그런데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김서철이 당신의 옷을 잡은 거야. 피는 지워졌지만, 이 부분은 마르지 않았고.”
제인은 자신이 가져온 옷가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하지만 현영은 반박할 거리가 있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내 옷을 잡았던 것도 내가 선생님한테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그런 허무맹랑한 얘기로 사람을 범인 취급하면 안 되죠!”
“당신. 112에 신고를 한 번 했었지? 왜? 112는 녹취가 기본이라 다 녹음 됐는데. 죽어 가는 김서철씨가 사력을 다해 당신의 이름을 불렀던 것까지.”
그때 제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지만 예상했던 발신자인 듯 그녀의 입꼬리는 올라갔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현영을 보며 말했다.
“욕실에서 확실히 루미놀 반응이 있었다네요. 당신은 살인미수예요. 김서철씨는 살아있거든.”
제인이 그녀를 약 올리듯 말했다. 현영은 순간 그럴 리가 없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시간이면 분명 죽고도 남았을 텐데!”
사람의 감정이란 폭발해 버리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스스로 감췄던 비밀을 드러내기 마련인 것이라.
“언제나 예상외의 상황은 생기기 마련이죠. 기적이란 것도 그래서 있는 거고.”
지은은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내가 당신 입 아플까 봐 동기에, 과정까지 상세하게 설명해 줬는데 잡아떼면 재미없는 거 알죠? 방금 본인도 좀 많이 인정했는데. 설마 그 청부살인업자라도 잡아 와라. 막 그런 건 아니죠? 그 바닥에 있는 사람들 절대 당신 그냥 안 놔둘걸.”
제인은 현영을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지훈은 조서를 쓰면서 해진에게 빨리 전화를 해줘야겠단 생각으로 가득했다.
제인은 지훈의 어깨를 툭 치고 일어나 먼저 조사실을 나가려 했다.
그 순간 현영이 소리를 빽 지르며 제인의 손등을 확 긁었다. 지훈이 깜짝 놀라 현영을 잡았다.
제인은 제 손등에 생긴 상처와 그 위로 맺힌 피를 보며 인상을 썼다.
조사실 문이 열리며 태경이 들어왔고 제인을 조사실 밖으로 내보냈다.
이후는 태경과 지훈이 현영의 맞은편에 앉아 남은 조사를 마저 진행했다.
현영은 허탈한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청부살인업자를 쓰기 전에 알리바이나 제대로 만들 계획을 세울 것이지.’
제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닫힌 조사실 문을 보고 있다가 몸을 틀었다.
사고 한 번 제대로 쳤다.
제인은 자리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앞뒤로 의자를 까딱거리고 있으니, 그녀의 어깨 위로 손을 턱 얹는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보니 상현이 서 있더라.
상현은 제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는 손뼉을 쳤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에게 엄지를 추켜세워주었다.
“캬. 신입 엄청난데. 신고식 한 번 제대로 치렀어. 피의자 잡아들인 건 그렇다 치고 과정이 상세해서 옆에서 보고 있다가 말하는 줄.”
“몇 분 안 걸렸어.”
“오, 한효은. 오랜만!”
이제까지 아무 말이 없다가 처음으로 그들의 대화에 낀 효은.
상현의 동기인 여자 형사였다.
상현이 뭐가 몇 분 안 걸렸다는 것이냐며 효은에게 물었다.
효은은 자신에게로 고개를 돌린 제인을 내려다보았다.
“저렇게까지 알아내는 데까지 전화 두 통이 끝이었어.”
상현은 효은의 말에 딱 형사감이라며 강력계로 온 것에 관해 칭찬하기 시작했다.
인재를 발견했다며 한 번 더 제인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제인은 상현을 한껏 노려보고는 제 머리를 정리했다.
상현은 머쓱했다.
그때 태경이 상현을 불렀고 제인의 행동으로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비워진 지훈의 자리엔 효은이 잽싸게 앉았다.
제인은 더 이상 말하기 싫은 듯 책상 위로 퍽 엎드려버렸다.
제인을 보는 효은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지훈은 확신이 든 듯 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 그리고 몇 번의 신호음 끝에 해진의 목소리가 들렸고 지훈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 아줌마.”
“어, 지훈아.”
“제인이 나와버렸어요. 러디사건에 신경을 쓰더니 갑자기…….”
“야, 송신입!”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갑자기 그에게 어깨동무를 해오는 상현으로 인해 그의 핸드폰이 떨어졌다.
상현은 미안하다며 지훈의 핸드폰을 주워주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지훈이 재빨리 폰을 주웠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뭐야, 뭐야. 무슨 전환데? 여자친구?”
“아, 아닙니다!”
이내 태경이 1팀 전원을 호출했다.
태경이 반짝반짝한 카드 한 장을 비장한 표정으로 보여주었다.
“계장이 최단 시간에 살인사건을 해결했다고 우리 신입들 맛난 거 사주시란다.”
“귀찮게.”
“회식이다, 회식!”
효은과 상현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지훈은 어서 제인을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뺄 수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오후 7시가 되자 태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1팀 전원 서를 나갔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 태경의 폰이 울렸고 ‘박씨’라는 발신자명을 화면에 띄웠다.
태경은 술 마시러 갈 때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전화를 한다며 통화버튼을 밀었다.
하지만 발신자의 말은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태경은 의아하단 표정으로 폰을 제인에게 건네주며 ‘박해진 프로파일러’라고 말해주었다.
천재 프로파일러가 강력계 신입에게 연락할 만한 일이….
아니, 이제까지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이를 생각하며 모두의 시선이 제인에게 꽂혔다.
제인은 심드렁하게 태경과 그의 핸드폰을 번갈아 보다가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왜요?”
“제인.”
“응.”
“우리 맛있는 거 먹자. 집으로 와. 일단 집으로 와.”
“진짜? 맛있는 거 해줄 거야?”
제인은 히죽히죽 웃으며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태경에게 건네주었다.
“저는 집에 가보겠습니다.”
“야, 야!”
“잠깐만.”
그 순간 효은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제인이 불쾌하단 표정을 잠시 지었다가 자신을 잡은 이유를 물었다.
그에 대한 답은 옆에 있던 상현이 대신했다.
“신입들이 주인공인데, 주인공이 회식을 빠지면 어떡해? 급한 일 아니면 회식에 참석해.”
아, 이렇게 되면 제인을 집에 데려다주려던 지훈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지게 되는 것인데.
제인은 개의치 않고 효은의 손을 밀어내며 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제 길을 가려는 제인이 또 멈춰 섰다.
이번엔 태경에 의해서였다.
그의 물음은 해진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에게 해줄 답을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그냥 한 마디 툭 뱉고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 * *
해진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대문 앞에 서성이고 있었다.
저 멀리 터벅터벅 걸어오는 지은. 아니, 제인이 보였다.
해진이 제인의 손을 잡고 재빨리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이 닫히자, 제인을 소파에 앉혔다.
그 앞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그녀와 마주 보았다.
“오늘은 뭐했어?”
“발뺌하는 사람 잡았어. 내가 다 말해줬는데도 아니래. 숨 쉬는 공기도 아까운 것.”
숨 쉬는 공기도 아까운 것.
범인에 대한 분노가 드러나 있었다.
말투는 투정 부리는 아이 같았지만, 그녀가 하는 말은 보통의 아이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해진이 다치진 않았냐며 불안감 가득 섞인 눈으로 물었다.
보통 다치지 않았냐며 물으면서 이리저리 살펴볼 텐데 해진은 그러지 않았다.
되도록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않으려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제인은 현영에게 긁힌 손등을 보여주며 ‘여기’라고 했다.
해진은 조심스럽게 손을 잡고 상처를 보며 ‘아팠겠다.’라고 해줬다.
제인은 서에서처럼 괜찮다고 했지만, 해진은 치료하지 않으면 흉이 진다며 테이블 아래의 구급상자를 꺼내 치료를 해주었다.
반창고까지 붙여주고 제인의 눈치를 보며 해진이 넌지시 물었다.
“어제는 뭐했어?”
“어제? 나 어제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해진이 다시 뭔가를 말하기 전에 제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맛있는 거 다 되면 부르라는 말을 하고는 제 방으로 향했다.
제인이 어제 아무것도 안 했다는 건 어제는 제인이 나오지 않았다는 건데.
‘그럼 확실히 다른 인격이군. 심지어 남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