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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May 08. 2017

어휴 그놈의 서울이 뭐라고

서울사는 부산 출신 불효녀의 회한

"어휴 그놈의 서울이 뭐라고"
헤어짐의 시간이 임박 할 때마다 엄마는 같은 말을 읊조린다. 그러게 그놈의 서울이 뭘까. 생활비, 주거비 드럽게 비싸고 경쟁은 또 얼마나 치열해. 최근엔 미세먼지까지 가세했으니 이 정도면 현실 지옥아닌가. 딱히 대꾸할 말을 못찾은 나는 옹알이하듯 웅얼대며 엄마의 핀잔에 답한다. 내가 생각해도 썩 논리적이지 못한 대답이다.

엄마는 위로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한참 취업 준비로 힘들 때, 고배를 마실 때마다 힘내란 말 대신 '니가 선택한 길이다', '남은 건 뭐 없나'란 비수만 돌아왔다. 예전엔 엄마의 그 점이 참 싫었다. 빈 말이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면 어디 덧나나. 지금이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한땐 내 가장 아픈 곳이었다. 나도 참 못됐다. 아쉬운 맘에 서울이 뭐냐고 구시렁대는 엄마에게 다정한 말 대신 엄마와 나의 간극을 확인시키는 언어로 공기를 채우기 일쑤니까. 역시 지지않는 엄마는 더 날카로운 말로 되받아친다. 그때쯤 나는 아주 조금 피를 흘리며 이젠 서울로 가야 할 때인가 보다 생각한다. 이 정도론 어림없지, 생채기도 안남는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엄마 입장도 이해는 간다. 멀쩡히 대학보내고 외국도 보내줬다. (엄마와 그 지인들의 언어를 차용하자면) '투자'할만큼 했다. 원래 속썩이던 애가 아녔다. 고등학교때까지 지각 한번 안했던 딸이다. 이성과 만나기라도 하면 일일이 보고할 정도로 솔직했다. 그때의 나는 엄마가 모르는 삶을 몰래 꾸리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었다. 다른 집에 비해 허용의 역치도 높은 편이었어서 큰 불편함은 모르고 살았다.

헌데 떨어져사니까 그게 아니더라. 나는 내 생각보다 배짱이 크고 겁이 없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간땡이만 커졌고 비대해진 간땡이는 엄마와 내 사이의 장벽이 됐다. 이걸 인지한 순간부터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부산에서의 안온한 삶보단 엄마의 비수에도 치명상을 입지 않게 맷집을 키우는 쪽이 낫다고 선택한 것 같다.

자아 선택'의 기로에 놓인 여인 에일리스 @영화 브루크린 스틸컷

문득 지난 겨울 본 브루클린이란 영화가 떠오른다. 아일랜드 태생의 여자 주인공 에일리스가 뉴욕에서 살게 되면서 겪는 일을 그린 영화다. 서사를 관통하는 주요 요소는 에일리스의 내적 갈등이다. 표면적인 갈등의 토대는 아일랜드, 뉴욕의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인의 고민이다. 그러나 내게 그 남자들은 메타포에 불과해 보였다. 고향과 타지에서의 삶, 가치관이 상이해 '자아 선택'의 기로에 놓인 여인의 내적 갈등이 각 도시를 대변하는 두 남성에게 투영된 듯했다.

에일리스처럼 아름답진 못해서 내게 그런 일이 생길리는 없겠다만 어쨌든 비슷한 갈등을 겪어 본 사람으로서 과몰입했던 기억이 난다. 난 애초에 착한 딸이 될 수 없는 운명이었나. 엄마가 미운게 아닌데,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큰데 마음 속 변덕의 진동을 나마저도 진단할 수가 없다. 진앙은 더더욱 모르겠다. 왜 나는 이별을 관성처럼 겪는 삶에 익숙해져버렸나. 기차를 타니 별 생각이 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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