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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Jan 05. 2018

남산타워

타향살이의 한이 투영된 구조물


“우리 새해소원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오늘 만난 모든 사람들과 새해 소원을 공유했다. 내 차례가 됐을 때 ‘연애하기’라고 말했더니 어떤 사람과 어떤 연애를 하고싶냔 꼬리 질문이 따라붙었다. 한 3초 정도 고민하다 내년에 나랑 남산에 3번 이상 가줄 그리고 매번 인생샷 찍어줄 사람이랑 만나고 싶다 대답했다. 무의식적으로 뱉은 장소 남산. 그러고 보니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가본 랜드마크도 남산타워였다.

이 해명 불가능한 남산 애착증의 근원 중 하나는 아마 드라마 삼순이일게다. 10년도 훌쩍 지나간 드라마를 거론하니까 어쩐지 노땅 같은데 당시엔 대단했다. 작품 곳곳에 심은 도회적인 장치는 부산 토박이인 내게 서울 판타지를 심어줬다. 제빵사를 파티시에로 승격시킨 직업적 세심함, 더블유와 클래지콰이의 세련된 OST 그리고 남산타워. 진헌이와 삼순이가 옥신각신 다투기도 하고 입맞춤도 했던 그 계단을 조용히 지켜보던 산 위의 등대 말이다.

삼순이 판타지를 안고 서울살이를 시작한 나는 삼순이처럼 살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현빈같은  연하남은 없겠지만, 삼순이란 이름같은 큰 콤플렉스 몇 개 쯤 안고 살아가겠지만 그럼에도 기죽지 말자고. 그게 이 도시에서의 생존법칙이라고. 내가 진흙탕을 구르든 꽃길을 걷든 저 거대한 지상의 등대가 밤이면 한결같이 세상을 비춰줄 테니까. 남산타워는 환기시켜주는 환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힘이 되는 존재였다.

그 동안은 어디 오가다 가끔 보는 남산타워였다만 올해 유독 볼 일이 많았다. 6개월간 서울역 근방에서 일을 한 덕이다. 마음이 잘 통했던 같은 팀 빛나와 난 고단할 때면 남산타워 근처를 배회했다. 어느 날은 후암동 언덕에 올라 커피를 마셨고 또 어떤 날은 해방촌을 탐방했다. 화창했던 날 팀 사람들과 앞으로는 서울 전망이, 뒤로는 남산타워가 보이는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 적도 있다. 가까운 친구는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야외결혼식을 올렸고 얼마 전엔 언니와 남산 근처에서 호캉스를 보냈다. 친구가 회사 근처로 놀러오면 무조건 소월로에 데려갔다.

하지만 양보단 질이랬던가, 어느 때보다 남산타워를 심적으로 가까이 느낀 한 해였다. 불안을 안고 해방촌 골목을 거닐다 찬란한 자본과 도시의 그늘을 동시에 목격하곤 초연함과 세속을 동시에 추구하는 내 이중성을 닮았다 생각했던 날. 마음이 답답해 남산타워가 보이는 회사 옥상에 올라 소리를 질렀던 날. 옥상 메이트 빛나가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재생했던 그 날. 고맙게도 도시의 등대는 이 모든 지질한 상념을, 지진계처럼 흔들리는 감정의 변곡을 묵묵히 어루만져줬다. 네가 오른 그 배가 타이타닉이든 통통배든 그저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게 내 소임이라는 듯. 그 무심함과 항상성이 꽤 큰 위안이 됐다.

아마 내년에도 올해만큼이나 남산 타워 주변을 배회할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소월로에서 꽃구경도 하고 노천카페에서 커피 마실 거다. 용기가 필요 할 땐 야경 불빛을 에너지원 삼기 위해 높은 델 오르겠지. 짜증이 날 때면 남산타워 네가 망망대해 속 이정표가 돼 달라며 소리 지를 테고. 빵 굽는 냄새로 힘든 나날을 버텼던 파티시에 삼순이처럼 나도 관성적 위안을 찾아 나설 계획이다. 이틀 앞둔 서른이, 어떤 날이 펼쳐질지 모르는 내년이 무척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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