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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Feb 08. 2018

웃긴 여자

남자는 좀 못생겨도 입 잘 털면 되는 시대의 종말

https://m.youtube.com/watch?feature=youtu.be&v=Z1eCO9nCJ2E


어제 ‘라면 먹으며 뚝딱 볼만한 콘텐츠’라며 친구가 스탠딩업 코미디 하나를 추천해줬다. 라틴계 미국인 크리스텔라 알론소의 쇼였다. 이민자 문제, 남녀차별 등의 예민한 사안을 통렬한 비유를 통해 비판하는 모습에 라면이 몸을 스치기 무섭게 소화되는 기분이었다. 관객과 호흡하는 몸짓과 생동감 넘치는 표정에 엔돌핀 폭발. 그렇게 어젯밤 닮고 싶은 여성 리스트에 새 이름이 추가됐다.

유쾌한 나의 우상 우피골든버그 @영화 시스터 액트 스틸컷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편향된 꼬리표 대신 ‘유쾌함과 연대’라는 성별 중립적인 카드로 최고에 오른 그녀들을 닮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유쾌한 여자에게 끌렸다. 잘빠진 다리나 풍만한 가슴 대신 자기 목소리로 이목을 끄는 그녀들이 부럽고 멋있었다. 내 첫 우상은 우피 골든버그다. 아마 시스터 액트를 스무 번도 넘게 봤을 거다. 갱의 애인이자 범죄의 ‘목격자’에 불과했던 그녀가 활기 잃은 성당(1편)과 불량아 소굴 학교(2편)를 되살리는 ‘주체’로 우뚝 서는 서사는 유년기의 날 설레게 했다. 주변 사람을 설득해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주인공으로 추대하는 방법론 또한 매혹적이었다.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편향된 꼬리표 대신 ‘유쾌함과 연대’라는 성별 중립적인 카드로 최고에 오른 그녀들을 닮고 싶었다.

@지인에게 받은 짤방
난 주변을 웃게 만드는 걸 낙으로 사는 사람인데 나를 속여가면서 이성에게 ‘간택’받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지향점은 끊임없이 현실과 충돌했다. 10대와 20대 초반의 나는 내 안의 개그욕심과 이성에게 조신하고 신비로운 여자로 비춰지고픈 욕망 사이에서 방황했다. 내가 남을 웃길 때 옆구리를 쿡 찌르며 ‘다음엔 그러지 말라’며 경고하던 친구도 있었고 대놓고 ‘너는 입 다물면 괜찮은데 입 열면 진짜 깬다’는 이도 있었다. 남자들 앞에서 개그욕심 안 부리는 게 매력 유지의 비결이라던 친구도 있었다. 나는 족쇄들 속에서 뭐가 옳은 건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난 주변을 웃게 만드는 걸 낙으로 사는 사람인데 나를 속여가면서 이성에게 ‘간택’받아야 하는 걸까.

매력 폭발 @영화 스파이 스틸컷
‘스파이’는 다이어트와 성형으로 자신을 무시했던 이들에게 복수하는 ‘미녀는 괴로워’나 외적 개입을 통해 예쁜 본판이 돋보이고 ‘여신’으로 거듭나는 신데렐라식 성공담에 한계점을 느낀 내게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그런 내게 답을 준 사람이 멜리사 맥카시다. 영화 ‘스파이’는 그녀에게 입덕 하는 계기가 됐다. 스파이 속 그녀의 모습이 나의 고민과 맞닿아있었기 때문이다. 짝사랑하는 동료(주드 로)에게 주인공 자리를 양보하고 주변인이길 자처한 그녀. 깍두기처럼 작전에 투입된 그녀는 현장에서 개그 본능과 정보요원으로서의 재능을 여과 없이 발휘하며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다. 보편적인 미의 기준과 동떨어진 여자가, 퉁퉁한 몸집 때문에 민첩하지 못할 거란 편견과 싸워야했던 여자가 자기 모습을 바꾸지 않고 성공을 거두는 이야기는 경각심을 일깨웠다. 스파이는 다이어트와 성형으로 자신을 무시했던 이들에게 복수하는 ‘미녀는 괴로워’나 외적 개입을 통해 예쁜 본판이 돋보이고 ‘여신’으로 거듭나는 신데렐라식 성공담에 한계점을 느낀 내게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마음껏 웃기고 조롱하자
웃긴 여자가 별로라면 그건 그 사람의 그릇이 작은 거지 내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외모가 중요하지만 남자는 좀 못생겨도 입 잘 털면 돼’. 인이 박히도록 들어온 대원칙이다. 이제 이 명제도 수명을 다한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데 여자도 잘생긴 남자 좋아한다) 유머가 한 개인의 장점이자 매력 포인트가 되는 덴 성별구분이 없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나의 개그 본능을 숨기지 않을 생각이다. 웃긴 여자가 별로라면 그건 그 사람의 그릇이 작은 거지 내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덕이다. 난 앞으로도 마음껏 조롱하고 웃길 예정이다. 또한 웃긴 여자가 아니라 웃긴 사람이 되는 그 날 까지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심기에 거슬리는 이들을 물어뜯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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