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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Feb 15. 2018

연산동 대통령

환영받고 태어나지 못한 존재들을 위하여


“연산동에 대통령이 나오겠네!”
이름 모를 한의사의 한마디가 아녔더라면 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1988년과 1989년 사이의 어느 날, 뱃속의 둘째를 출산할지 말지 고민하던 엄마는 동네의 한의원을 찾았다. 첫째 아이 하나도 버거운 가정 형편에 덜컥 둘째가 생겼으니 기쁨보단 걱정이 앞섰을 게다. 그나마 ‘대를 이을’ 아들이라도 낳으면 명분이 설 텐데 첫째에 이어 둘째까지 딸이면 육아뿐만 아니라 심리적 부담까지 배가 되는 셈이니까.

엄마는 결국 몸속에 둥지를 튼 생명이 아들인지 딸인지 확인하러 집을 나섰다. 당시 한의원에서 실시되던 성별확인법은 상당히 원시적이다. 맥을 짚어서 맥이 팔팔하면 아들이고 차분하면(?) 딸이라고 알리는 정도. 아마 한의사들도 이 방법이 신빙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이 진료행위가 가능했던 이유는 산모의 내적갈등과 남아선호사상이라는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찾은 한의사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딸이다, 아들이다’란 답 대신 ‘연산동 대통령감이 뱃속에 있다’고 진단했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출산을 결심했다고 했다. 내심 대통령감이 아들이기 바라며. 그렇게 1989년 6월 2일 자시에 연산동 대통령감이 처음으로 세상의 빛과 조우했다. 기대 속에 태어난 예비 후보의 성별은 딸래미였다.

운 좋게 ‘엄마의 고민’이란 장벽을 넘어 태어났지만 눈앞에 더 큰 벽이 있었다. 양수 밖 세상은 어린 나에게 가혹했다. 나를 보는 어른마다 “저게 고추를 달고 태어났어야 했는데...”라며 혀를 끌끌 찼다. 어린 시절 언니에 비해 예쁘지 않은 외모를 두고 “남자였으면 괜찮았을 텐데”란 말도 적잖게 들었다. 하루는 대여섯 살의 내가 주섬주섬 어디 나갈 준비를 하더란다. 엄마가 “어디가냐”고 묻자 나는 슈퍼에 간다고 답했고 왜 슈퍼에 가냐는 말에 “고추랑 풀사러 간다”는 명답을 날렸단다. 이때부터 세상을 삐딱하게 보고 조롱하는 습성이 시작된 셈이다. 태생부터 환영받지 못한 존재라니 얼마나 가련한가.

아마 나랑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상당수의 여자들이 그랬을 것이다. 환희 속에 태어난 이도 있었겠지만 ‘네가 아들이었으면 좋았을 텐데’란 가정법을 짐처럼 떠안고 살아야 했던 이들도 적잖을 거다. 위로랍시고 “네가 우리 집에서 아들 몫을 할 거래”란 말을 듣고 자란 이도 있을 거다. 딸 몫, 아들 몫이 뭘까. 맥이 팔딱팔딱 뛰면 아들이고 차분하면 딸이라던 성별감정법을 사회에 치환한 것과 비슷한 걸까. 명절에 맞춰 여기저기서 터지는 볼멘소리를 듣자니 회의감만 커진다. 성별 대신 ‘대통령감’이란 답으로 생존의 기회를 준 한의사 선생님께 좀 죄송한 이야기지만 이 부분에 있어선 기계적 중립을 견지 못하겠다. 아무래도 대통령감은 아닌가보다.


(사진은 연산동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오클랜드와 서울에서 둥지를 틀고 사는 두 딸의 모습. 언니는 내 최고의 친구이자 지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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