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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Aug 10. 2018

내 딸이 제일 예뻐 경연대회

CL을 응원하며

학창시절엔 친구가 많았다. 지금은 10분의 1로 준 것 같다. 10분의 9를 제친 행운의 인물들의 공통점을 추려봤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내 몸에 관심이 그닥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내 체중이 갑자기 증가했든 빠졌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저 눈앞의 나와 오늘 뭘 먹을지 고민한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물론 얼굴 좋네(살 붙었네), 살이 빠졌네 하는 정도의 안부인사로 기분 나빠 하진 않는다. 하지만 ‘평가’가 개입하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나는 나를 관찰하고 평가하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불편해한다. 사람이라면 응당 타인을 관찰하고 평가하겠지만 그것을 당사자에게 직접 발화하는 건 다른 얘기다.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나를 보자마자 ‘너 SNS에서 보고 살 빠지고 예뻐졌다 생각했는데 보니까 그대로구나’라고 한 것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응 그땐 졸라 마음 고생해서 빠졌는데 살만하니까 다시 살이 붙었네. 아니면 응 나 한 사진발 하잖아. 좋은 대답을 찾지 못해 허허 웃었다. 나의 체중 변화를 굳이 설명해야 하는 그 상황이 우스웠다.

내가 유독 예민한 걸 수도 있다. 변명하자면 어릴 적부터 하도 몸으로 비교 당해서 트라우마 같은 게 생겼다. 엄마와 엄마 지인들은 늘 이상한 경쟁을 한다. 이른바 우리 딸이 젤 예뻐(혹은 젤 말랐어) 경연 대회 같은 거다. 나는 얼굴, 키부터 종아리 둘레까지 엄마 지인 자녀들과 비교당하며 자랐다. 몇 년 전에 엄마와 엄마 지인 가족들과 카페에 갔다가 ‘예전엔 은혜 니 다리가 더 얇았는데 이젠 ㅇㅇ이 다리가 더 얇네’란 말을 듣고 마시고 있던 커피를 뱉을 뻔했다. 매년 종아리가 얇은 자녀가 수상하는 노벨 종아리상이 존재하는걸 내가 미처 몰랐던 것이라면 나의 불찰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보상이 불분명한 대회 무대에 서는 게 늘 못마땅했다. 결국 얼마 전에 엄마 친구와 한판 붙었다. 날 두고 살이 빠졌니 쪘니 설전을 벌이는 엄마 친구들에게 몇 십 년 내내 내 몸 이야기 하는 거 지겹지 않냐고 쏘아붙인 것이다. ‘너한테 관심이 많아서 그런 거야, 예쁘면 좋잖아’ 라고 답한 한 아주머니에게 2차로 달려들었다. 저는 그런 관심 필요 없어요.

파워 당당하게 말했지만 사실 나도 모순적인 인간이다. 내 내면엔 두 개의 욕망이 충돌한다. 예뻐 보이고 싶은 욕망과 외모 평가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망 말이다. 전자를 포기하고자 수차례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갑자기 살이 찌면 초조해져서 밥을 줄인다. 탈코르셋 운동을 지지하면서도 정작 나는 아이라인과 비비크림을 놓지 못한다. 내 딸이 젤 예뻐 경연대회 중도 하차를 공식 선언했으나 무대에 올랐던 관성이 아직 남아있는 탓이다. 내면에서부터 해방이 시작돼야 할 터인데 내면의 창과 거울이 같은 크기인 게 문제다. 라깡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더라면 팔목잡고 물어 봤을 거다. 혹시 절 사찰하신 겁니까?

사회가 요구하는 ‘여자 구색’을 갖춰야 내 할 말 편히 할 수 있다는 현실인식


그래서 최근 CL의 행보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보란 듯 건강이상설을 부인하고 깔쌈한 무대를 선보인 그가 멋져보였다. 말랐을 때 행복하지 않았다며 펑펑 우는 에일리를 보곤 경연대회의 악몽이 떠올랐다. (이 와중에 비쩍 마른 아이돌에게 건강이상설을 들이밀지 않는 상황이 신기하다) 댓글을 보니 가관이다. 연예인은 몸이 재산이다 자기관리 좀 해라, 저 둘에게 환호하는 애들은 자기 위로하는 거다 등등. 너무 당당해서 관련 헌법 조항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다. ‘재산’이라니 연예인의 몸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소름끼치는 발상이다. 혹자는 몸값 운운하는데, 시장에서 몸값이 결정되는 건 맞지만 연예인 또한 가격 결정의 주체다. 다른 요소로 본인의 가치를 충분히 높일 수 있단 의미다. 난 특히 ‘자기 위로 기제로 씨엘을 이용한다’는 비아냥이 가장 못마땅하다. ‘살찐 것 = 열등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땅은 살 있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곳이다. 시위 피켓을 든 통통한 손은 조롱대상으로 소비되기 일쑤다. ‘너는 성폭력 위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못생겼어 or 뚱뚱해’식의 레토릭도 쉬이 유통된다. 몸의 논리가 기본권 억제를 정당화하는 형국이다. 아마 나의 자아 분열도 여기서 비롯했을 거다. 사회가 요구하는 ‘여자 구색’을 갖춰야 내 할 말 편히 할 수 있다는 현실인식 말이다.


사이즈와 존엄이 연계되는 행태, 지긋지긋하다.


앞으로 더 많은 CL이 매스컴에 나왔으면 좋겠다. ‘연예인 ㅇㅇ씨 출산 후 극적 다이어트 성공’ 이런 소식은 이제 그만보고 싶다. 사이즈와 존엄이 연계되는 행태, 지긋지긋하다. 외모와 몸에 대한 내 피해의식이 유별나다고 지적해도 할 말은 없다. 하나 확실한 건 내 의사와 무관하게 그 압박감 속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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