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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Jul 21. 2019

내 이름 석자. 운명과 옥명 사이

이름값하며 살겠다는 다짐

왜 이름이 진은혜냐. ‘지는 해’ 같아 어감이 별로란 말에 한결같은 내 대답.
“우리언니는 별로 안진지한데 진지혜야”

지혜와 은혜. 성 빼고 보면 자매 이름으로 괜찮은 듀오인데 앞에 ‘진’을 붙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결혼하고 아이 엄마가 되어서도 비글미 내뿜는 내 언니 진지혜와 해 지는 줄 모르고 재잘대는 진은혜. 언니와 나는 30여 간 (역)이름값 하며 살았다.

처음부터 진은혜는 아녔다. ‘진’이라는, 귀하면 귀하단 성씨를 예쁘게 쓰고 싶었던 아버지는 곧 태어날 막내딸 이름을 ‘아리영’으로 내정했단다. 모 막장 드라마 작가의 기념비적 캐릭터로 유명한 아리영이란 성명을 우리아빠는 훨씬 더 옛날에 구상했단 말이다. 역시 내 아버지답게 힙스터스러운 발상이다. 참고로 아리영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부인 ‘알영부인’을 풀어 읽은 이름이다. 직선제 개헌, 88올림픽이란 국가적 이벤트로 한껏 들뜬 89년에 태어날 딸래미가 신흥경제대국의 영부인이라도 되길 바랐던 것인가, 아빠는 희귀하고 싶은 욕심과 권력욕을 동시에 딸 이름에 투영했다.

그러나 가족 간 위계와 전통이 아리영의 탄생을 가로막았다. 방해꾼은 살아계실 적 무척 사랑했던 외할아버지다. 역학과 사주를 공부한 덕에 가족 일원이 새 차라도 뽑으면 손수 차번호를 만들어올 정도로 열혈 운명꾼이었던 할아버지가 몸소 손녀의 이름을 지어온 것이다! 할아버지 역시 다가올 90년대가 벅차고 설렜나보다. 손녀딸의 이름에 새 시대의 도래와 광명을 그대로 담았는데 그 이름 하여 구슬 ‘옥’에 밝을 ‘명’, 옥명이라. 태어날 아가가 혁거세 부인에서 눈부신 구슬로 바뀐 순간이다. 참고로 내 고장 경상도 사람들은 ‘명’을 ‘맹’으로 발음한다. 그때 옥명론이 관철됐더라면 나는 한평생 진옥’맹’이라 불렸을 거다.

옥명이가 옥맹이 되리란 걸 직감한 어머니의 극렬한 반대 덕에 옥명론도 좌절됐다. 그렇게 찾은 타협안이 은혜다. 친가 쪽 여자 이름 함자가 ‘혜’라 랜덤으로 걸린 셈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은혜, 지혜가 ‘진’을 만나 엉뚱한 의미를 지니게 됐지만. 아마 선택받지 못한 아리영과 옥명이가 손잡고 복수한건 아닐까. 물론 짐작이다.

결국 진은혜라는 이름은 가족 관계의 반영이자 (옥맹이는 피하자는) 투쟁의 결과물이다. 지금 내게 소중한 이름들, 소중했던 그리고 앞으로 소중할 이름 모두 고민, 애정, 크고 작은 다툼의 산물이겠지. 저마다 이름값 하려 부단히 역사를 새기고 있을 테고. 나도 그래야겠다. 새 시대가 떠나간 자리에 남아 꾸역꾸역 살아 가야겠다. 아리영이랑 옥명이 안 억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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