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 부석사
이다까씨가 사정이 있어 이번 부석사 트립은 함께하지 못했다. 혼자라도 못 갈쏘냐 부석사를 찾아간다.
신라 문무왕 1년(661) 의상대사(義相大師)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대사를 연모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때 대사가 탄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 후 의상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異敎徒)들이 방해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神龍)이 나타나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쳤다. 그래서 이 돌을 ‘부석(浮石)’이라 불렀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石龍)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 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부석사가 공중에 뜬 바위(浮石)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갖게 된 전설이다. 유서 깊은 사찰의 창건 배경에 의외의 로맨스가 있다는 게 재미있다. 그것도 금욕과 절제의 상징인 스님과 관련된 러브스토리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님은 신념을 버리고 사랑에 빠지시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부석사는 경부 영주 소백산국립공원의 자락인 봉황산에 위치해 있다. 주차장에서부터 올라가는 길은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우거진 완만한 경사로인데, 지금은 한없이 초록초록 하지만 가을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충분히 상상이 됐다.
유명세에 비해서는 규모가 압도적으로 크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원형의 오목한 지형에 절과 탑들이 적당히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고 센터인 무량수전에서 정면을 바라볼 때 시야에 가리는 것이 없이 탁 트여 있어서 아늑하면서도 개방감이 있었다.
유명하다는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의 배는 생각보다는 볼록하지 않아서 놀랐지만(얼핏 봐서는 모를 수 있으니 부석사에서 기둥이란 기둥은 다 눈여겨보시라), 여름이라 열어놓은 들창의 모양이 독특해서 눈길을 끌었다.
여기서 가장 특별한 점은 절 내부의 부처님은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거다. 들어서면 부처님의 오른쪽 옆모습을 먼저 알현하게 된다는 것! 설명에 따르면 불상이 앉아 있는 불단은 건물의 서쪽에 치우쳐 있고, 불상은 동쪽을 향하고 있어서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에 있다는 불교 교리를 반영한 독특한 배치라고 하는데, 나는 그냥 아무래도 부석사 부처님은 오른쪽 얼굴이 자신 있었던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을 한다.
떠 있는 바위라는 부석의 틈에 팔을 깊숙이 넣어 확인해 보려 했는데 만지지 못하게 막아 두어서 못했다. 이다까씨가 있었다면 감시를 피해 손을 넣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다까씨의 부재가 크게 느껴졌다.(만약 정말 떠 있지 않으면 가차 없이 까였을 것이다) 바로 아래쪽에는 소조아미타여래좌상(塑造阿彌陀如來坐像)이 모셔져 있는데, 불상의 이름에서 보듯 소조(塑造) 즉 흙을 빚어 만들었고 아미타여래 즉 아미타불로 분류되는 좌상이다. 다만 일반적 아미타불과 달리 한 손은 무릎에 얹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觸地印)을 하고 있어 석가모니불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흙으로 만들어 거친 촉감이 그대로 느껴지는데 하필이면 발밑에는 참선 중에 갈비뼈가 다 드러난 싯다르타 좌상이 놓여 있어, 세속을 떠난 이들의 고행을 상상하게 했다.
올라갈 때는 고개를 들어 위쪽 무량수전만 보느라 지나쳤던 것들이 내려오다 보니 하나둘 보인다. 법종각 아래 양쪽으로 서 있는 삼층석탑을 찬찬히 살펴보니 심플하면서도 균형미가 돋보이는 멋진 탑이었다.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올라간 것이 전형적으로 안정적인 통일신라 양식이라더니 말 그대로 안정감 있고 간결해 보였... 는데 지붕돌(옥개석)의 네 모서리가 살짝 들려 있어서 마냥 심심한 모양새만은 아니라는 게 보인다. 이 탑을 지은 석공이 절의 분위기가 너무 엄근진 한 거 같아 약간의 경쾌함을 더했을지도 모르겠다. 소원빌기를 좋아하는 이다까씨라면 경쾌한 걸음으로 탑돌이를 조금 했을것 같다.
마지막으로 당간지주를 지나치다 보니 정호승의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指)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창비)
정호승의 시 외에도 많은 문학작품에서 부석사를 만날 수 있다.
신경숙은 소설 「부석사」에서 연인의 배반으로 뜻하지 않은 이별을 당한 그녀와 회사 동료로부터 배신당한 그 남자가 1월 1일을 맞아 부석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렸다. 그들은 풍기를 지나 지방도로 접어들었다가 길을 헤맨다. 우연히 전각에 이르러 영주 신암리 마애삼존불을 구경하기도 하지만, 철도건널목 앞 세 갈래 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산길에 이르고 진창에 빠진다. 그들이 탄 차는 산속에 고립된 채 눈 속에 갇히고 만다. 그녀는 그와 자신이 포개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닿지 않고 떠 있는 '부석'처럼 느낀다.
"부석사의 포개져 있는 두 개의 돌은 닿지 않고 떠 있는 것일까. 커피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자꾸만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다. 그녀는 문득 잠든 그와 자신이 부석처럼 느껴졌다. 지도에도 없는 산길 낭떠러지 앞의 흰 자동차 앞 유리창에 희끗희끗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
(『제25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 신경숙 「부석사」, 문학사상사)
오늘은 혼자라 어디서 뭘 먹어야 할지 정하기가 어려웠다. 가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하면서 가다가 회전교차로를 몇 번 지나치는 동안에 방향을 완전히 잃기도 했다. 이다까씨가 옆에 없으니 밥 한 끼 먹지 못하고 영주를 벗어난다. 이제야 왜 그토록 많은 문인들이 부석사를 두고 상실과 그리움을 이야기했는지 알겠다. 부석사는 다음에 이다까씨와 다시 와야겠다. 그렇다고 뭐 그립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