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p 5. 속리산 법주사

미륵불은 사이즈로 압도하고 반찬은 가짓수로 압도하는 법!

by 김벼룩

지난 7월 중순 지루한 장맛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아직 구름은 잔뜩이지만 비가 그친 날 아침, 단 두줄의 대화로 트립이 시작됐다. 일단 출발! 약 15분 후에 갑자기 생각난 듯이 이다까 씨에게 물었다.

“우리 오늘 어디 가지?”


너무 더워서, 비가 와서,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둘 다 어지간히 목이 말랐나 보다.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 출발해도 걱정 없다. 한국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차를 달려도 좋은 절은 만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일단 고속도로에 차바퀴 올리고 정한 곳은 충북 보은 법주사(法住寺)다.

법주사는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내에 있다. 속리산에 가기 위해서는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야 하는데 산-터널-산-터널의 끝없는 반복으로 “봤지? 이게 내륙이다!”하는 식이다. 안 그래도 바다가 없는 내륙 지방인 충북 중에서도 법주사가 있는 보은은 변변한 강도 호수도 없어서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중고등학교 때는 수련회 하면 늘 속리산에 왔었는데 수학여행 명소인 경주나 설악산, 제주도와는 달리 속리산이 수련회로만 인정받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펄펄 끓는 10대들을 묶어놓고 ‘목봉 들기’ 같은 걸 시키려면 아무래도 고립된 환경이 필수조건이었나 보다.

‘호서제일가람’이라는 자긍심 뿜뿜 일주문을 지나, 돌담으로 둘러쳐진 금강문을 넘어, 공사 중 펜스로 막혀있는 천왕문을 옆으로 돌아서는 순간 아, 이것이 글로만 읽었던 국내 유일의 목조5층탑 팔상전!

ⓒ보은군청

2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5층의 층층 지붕이 피라미드처럼 아래쪽으로 갈수록 넓어진다. 지금까지 봐왔던 지붕 모양이랑은 확연히 다른 정사각형 모양 지붕에(나중에 확인해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사모지붕이라는 형식이었다) 꼭대기에는 피뢰침처럼 튀어나온 모양이라 외형에서부터 그 규모와 유니크함에 일단 압도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건물 안에서 올려다보면 중심에는 큰 기둥이 1층부터 5층까지 하나로 세워져 있고, 네 모서리에는 보조 기둥들이 서 있다. 모든 층에 중심 기둥과 큰 들보를 통해 서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어 내부를 복잡하면서도 공학적으로 보이게 한다. 층별로 바닥이 있는 구조는 아니라 아래쪽에서 지붕 쪽을 올려다보면 기둥과 구조물 사이로 꼭대기까지 내부가 뚫려 있는 느낌이다. 5~600년 전 조선시대에 변변한 측량 도구도 건축 기계도 없었을 텐데, 이렇게 공학적으로 안정적이면서 심미적 구조물을 만들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팔상전 내부에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8개 장면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팔상도(八相圖)가 중심 기둥의 네 면에 그려져 있었는데, 내부 촬영도 안 될뿐더러 팔상도는 다른 더 유명한 절이 있다 하여 이번에는 가볍게 보고 넘어가자 싶었다.

ⓒ보은군청

이다까씨의 동의를 구하려고 돌아보니 이다가 씨는 “Size Does Matter!”를 외치며 눈에 빛을 내고 있었다. 팔상전 측면에는 세계 최대의 미륵불 입상이라는 금동미륵대불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 아파트 10층 높이의 33미터짜리 금불상 앞에 서니 일단 규모에 압도된다. 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전체가 진짜 금일까? 돈으로 치면 얼마야?” 하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정말 답을 알겠다는 의지는 미약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데, 평소 투자에 관심이 많아 주식, 코인, 금 등 모든 자산투자에 빠삭하고 돈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붙는다는 지론을 가진 이다까 씨의 눈빛은 마치 오래된 꿈을 마주한 듯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가 아무리 사전정보 없이, 끌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다니고 있지만 이 궁금증은 바로 해소되어야만 했다. 보은군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었다.

- 최초는 통일신라시대 때 진표율사에 의해 금동미륵대불로 조성되었으나 흥선대원군 때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서 없어졌다가 => 아... 경복궁 안에 법주사 미륵대불 있다.

- 일제강점기인 1939년 한국 근대조각의 대가인 김복진이 맡아 시작된 미륵대불 조성은 시멘트조로 진행됐다. 불상을 조성하던 중 80%의 공정이 진행되는 상태에서 625 동란으로 중단되었다. => 아... 가슴 아픈 현대사가 다 들어있다.

- 종전 이후 나머지 공정을 진행하여 1964년 5월에 이르러서야 대불의 완성을 보았으나 자연 훼손이 심해 1986년 해체하고, 시멘트로 크기와 모습 그대로 1990년 4월 청동제 미륵대불로 다시 조성하여 완성을 보았다. => 청동 116t이 들어간 세계 최대 청동제 미륵불의 탄생이다.

- 이후 2000년 개금불사를 일으켜 2년 만인 2002년 황금 80kg을 들여 금동미륵대불을 완성했다. => 결론은... 금이다!!!

국보 제5호인 쌍사자 석등, 보물 제15호 사천왕 석등 등 조형미가 뛰어난 석등이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중심로에 늘어서 있고, 무량사의 극락전,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의 하나라는 대웅보전의 사이즈도 예사롭지 않았다.

법주사 당간지주는 다른 절과는 달리 22미터라는 압도적 높이의 철당간이 그대로 남아있었다(지난번에 다녀온 부석사도 돌로 된 당간지주만 남아있었다) 고려 초에 조성되었다가 조선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주조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사찰의 금속물을 징발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가 1910년에 다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법주사는 이래저래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의 피해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활짝 피어있는 연꽃에 앉아 있는 마애불 조각을 끝으로 법주사를 나온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신대사라는 분이 서역에서 귀국하면서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에 있었기 때문에 법주(法住)사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승려 영심(永深)이 중창하면서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되었고, 이후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승려 유정(有定)이 팔상전을 중건하는 등 수 차례 중건·중수를 거쳤다.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목탑인 팔상전을 비롯하여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여러 문화재가 있어 신앙유적으로서의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인정받아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규모에서 몇 번씩이나 압도당하고, 다양한 보물·유물의 가짓수에도 놀라고,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여러 사연에 감탄하게 되는 곳, 바로 법주사다.

템플트립이 곧 푸드트립인 우리가 법주사에서 찾은 곳은 평범해 보이는 산나물 정식집이었다. 주문과 동시에 4인용 테이블의 모서리부터 채워지는 세팅기술이 예사롭지 않더니 결국 하얀 테이블보 위에 바둑판이 만들어졌다. 가짓수를 세는 것은 무의미하다. 맛과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큰 과제다. 김벼룩은 사장님의 담금주 컬렉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두 개가 아니어서 감히 맛 보여 달라 청하지를 못한다.

비가 와서 길가에 차를 세운 후 식당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왔는데, 사장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신다. “배터리 나가겄네.” 처음엔 무슨 말씀인지 몰라 모른 척했는데 나중에 보니 급히 들어오느라 비상등을 켜놓았던 것. 계속 비상등을 켜두면 배터리가 나갈 수 있으니 어서 가서 끄라는 말씀을 단 두 어절로 끝내셨다. 이것이 충청도식 무심생략(無心省略) 화법인 건가. 법주사 앞에서 식당을 하시니 말씀도 부처님 같으시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Trip 4. 영주 부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