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트립 번외편_울주 청송사지

청송사지 가는 길

by 김벼룩

퇴사한 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알람이 울리자 자동으로 몸이 일어났다. 눈을 비비고 화장실로 가서 면도를 하고 세수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기는데 문득, 오늘 이렇게 서둘러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몸은 이미 출근 준비를 다 마쳐 버렸다.

그렇게 나는 집을 나섰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을 켰다. 사실 켤 필요도 없었다. 매일 같은 길이었다. 부산에서 경주까지, 70km가 넘는 거리를 왕복 세 시간. 내 하루는 늘 국도 7번으로 시작해서 국도 7번으로 끝났다.

3년 동안 한 번도 늦지 않았고, 한 번도 병가를 쓰지 않았다. 하루라도 결근하면 계약 연장이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꽉 채워 일했지만, 그 결과는 계약 해지였다. 정규직 전환은 없었다. 아무 설명도,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통보였다. 그런데도 오늘, 몸은 또 국도 7번에 올랐다. 습관은 이토록 무섭다. 회사 쪽으로 핸들을 꺾다가, 문득 브레이크를 밟았다.

“내가...... 어디 가는 거지?”

차를 갓길에 세우고 한참을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긴 하루가 있을까. 마음 한구석이 비어 바람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멍하니 계기판을 바라보다 내비게이션을 열어 근처를 검색했다. ‘청송사지(靑松寺址).’ 멀지 않았다. 울주로 내려서는 이정표가 보였다. 그토록 여러 번 지나쳤으면서도 한 번도 세워보지 못한 곳. 가볼까, 하고 핸들을 돌렸다.

울주로 들어서자 새벽의 바람 냄새가 달라졌다. 바닷바람 대신 산의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녹음 사이사이에 작은 비닐하우스와 농기계가 보였다. 세상은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청송사지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사찰이었다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삼층석탑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했다. 조선시대 부도도 있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고, 1810년 무렵에 문을 닫은 절. 나보다 훨씬 오래 살다가 사라진 곳이었다.

차를 세우고 내렸다. 마을 입구에는 ‘청송마을’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있었다. 전체가 예전에는 사찰 경내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몇 안 되는 인가가 모여 있는 평범한 시골 마을이었다. 길가에는 한 할머니가 호박잎을 다듬고 있었다.

‘여기가 진짜 그렇게 컸을까.’

의심스러웠다.

길을 따라 걷자 펜스 안에 삼층석탑이 보였다. 생각보다 작았다. 일부는 부서져 있었고, 이끼가 낀 돌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허무하게도 느껴졌다. ‘뭐 이렇게 초라하지’ 하는 실망감이 먼저 찾아왔다.

조금 더 들어가니 숲 속에 부도가 있었다. 부도라지만 마치 버려진 장독대 같았다. 주변엔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그 안에 파묻혀 있는 듯 보였다. 나는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나도 여기처럼 된 건가.”

삼국시대에 창건되어 통일신라를 지나 고려, 조선을 거치고, 1810년 무렵에 문을 닫은 절. 그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얼마나 많은 스님과 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오갔을까. 그런데 지금은 폐허였다. 부서진 탑과 풀 속의 부도만 남았다.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재계약에 실패한 내 처지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결국 사라지는 건 모두 같다. 그렇게나 크고 화려했던 절도 사라지고, 매일 바쁘게 일하던 나도 멈췄다. 폐허가 된 청송사지 앞에서 나는 이상한 동지애를 느꼈다. 부도 옆 돌에 앉아 잠시 바람을 느꼈다.

“이제 어디 가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뿐. 나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 탑도, 이 부도도, 이렇게 아무도 없는 시간에 누군가의 작은 안식처가 되었을까. 사라지고 무너져 내리고 나서야 누군가에게 비로소 진짜 자리를 내주는 곳. 청송사지 삼층석탑은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

하늘을 향해 조금씩 무너져 내려간 돌들의 층계를 보았다. 돌들이 비바람에 깎이고 깨져도, 아직까지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서글프면서도 고마웠다.

그제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주 작은 울림이 일어났다.

‘너도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지.’

누군가 내 어깨를 쓰다듬는 듯한 감각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이 탑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고했어. 그래도 아직 이렇게 있잖아.”

갑자기 눈물이 났다. 정작 사무실에서 짐을 싸서 나올 때도 눈물은 나지 않았었는데. 황급히 손등으로 닦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부서진 탑과 내 안의 무너진 것들이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곳이 아직도 누군가의 발걸음을 받듯이, 나도 다시 누군가에게 작은 자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햇살이 숲 위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다시 둘러메고 일어났다.

걸어 나오는 길, 부도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무언가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빛에 젖은 삼층석탑이 묵묵히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쓰러져도 괜찮다. 이렇게라도 남으면 된다.’

바람이 불었다. 풀잎이 흔들렸다. 나는 다시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걸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딘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여기 울주 그 사라진 절터에서, 부서진 탑과 함께 조용히 서 있는 법을 배웠다.


*이 글은 청송사지 트립에서 겪은 일과 떠오른 생각을 바탕으로 창작한 팩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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