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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ESI May 18. 2022

나를 알고 싶다면, 일기 말고 '일지'

 초등학교를 대표하는 숙제가 있다면 ‘일기 쓰기’가 아닐까 싶다. 보통 저학년 때는 그림일기를, 고학년 때는 줄글로 일기를 쓴다.


 대부분은 일기 쓰기를 죽도록 싫어했다. 일기 면제권을 받기 위해 노력하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한 번씩 '오늘은 진짜 일기 쓰기 싫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졸업식 날, 반 친구는 말했다.


 "내 인생에 일기 쓰는 일은 다신 없을 거야!"


 졸업보다 일기를 안 써도 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초등학생이었다.





 그 시절, 일기를 쓰지 않겠다던 어린이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그때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린 걸까?


 어른이들 사이에서 일기 쓰기가 유행이 되었다. 레트로 열풍을 타고 '다이어리 꾸미기' 유행이 도래했고, 간단한 기분 기록부터 매일 일기 쓰는 알람까지 다양한 어플이 출시되었다. 일기를 쓰는 건 연예인도 마찬가지였다. 예능 '나 혼자 산다'에서는 수 많은 연예인들이 일과 후 일기를 쓰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나 또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 건 3년 전이었다. 넘치는 감정과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훗날 추억이 되고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문제는 내가 쓴 기록들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토해내듯 쓰다 보니 객관적이지 못했고, 이렇다 할 실질적 정보가 들어있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지만, 이왕이면 내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일지'이다.




 일기와 일지. 음소 하나만큼의 차이가 있는 두 단어는 비슷한 듯 다르다. 일기는 조금 더 감성적이고 주관적이라면, 일지는 객관적인 기준을 두고 나를 관찰하고 장기적으로 분석하는 용도이다. 일기는 내용도 형식도 자유롭지만, 일지는 주어진 가이드라인에 따라 써야 한다.







 나는 업무일지, 가계부, 독서일지, 건강일지, 식단 일지, 총 다섯 개의 일지를 쓴다. 상황에 따라 추가될 때도 있고, 줄어들 때도 있는데 1여 년이 지난 지금 대략 5개 정도로 추려졌다. 보통 업무일지와 건강일지는 매일 쓰고, 가계부는 일주일에 한 번, 독서일지와 식단 일지는 필요할 때마다 쓰는 편이다.




 용도와 목적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일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날짜와 시간(구체적일수록 좋다), 객관적인 증상 또는 현상. 나는 좀 더 확장해 당시 있었던 상황이나 나의 감정, 또는 내가 발견한 문제점의 해결방안feedback 등을 적어 놓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식단 일지를 작성한다면, 먼저 내가 먹은 음식들을 시간 대 별로 쓴다. 그리고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이나 대체할 수 있는 건강식품 등을 기록한다.




 처음에는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쉽지 않았지만, 꾸준히 하면서 이 방법이 맞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는 불안이 높은 편이라 종종 이유 없이 아프거나,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경우가 있다. 내 몸임에도 불구하고 내 상태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니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한창 몸이 안 좋았을 때는 조금만 몸이 아파도 약을 왕창 먹거나 병원 쇼핑을 다니기도 했다.




 일지는 내 몸을 알아가는 과정이자 가이드라인이었다. 일시적인 현상인지, 주기적인 현상인지, 문제 상황이 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를 터득해나가는 것이다. 기록하고 관찰하고 피드백하며.


 사람의 몸은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 세포의 종합에 불과하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순간의 감정과 상태에 좌지우지했을 때에는 크게 느껴진 것들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니 모두 나름의 패턴과 규칙이 있었다. 거기에 의학적 소견이 더해지니 당연한 현상이 되어버렸다.


 그걸 받아들이자 내 ‘상태 변화’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감정이 진정되자 증상도 호전되었다. 불안이 증상을 심화시키고 있었던 거다.





 또한, 일지를 쓰면서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우리는 ‘평균의 늪’에 빠져 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몸무게이다. 각 키에 적합한 표준 몸무게, 미용 몸무게 표를 그려놓고선 그 안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한다. 그리고 그 숫자 안에 들지 못하면 스스로를 괴롭힌다.


 하지만 사람마다 체형도, 근골격량도, 체지방량도, 활동량도 다르기 마련이다. 즉, 나에게 맞는 몸무게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날마다 내 몸무게와 식단, 상태를 기록하면서 내 몸에 대한 나만의 기준이 생겼다. 그러자 스트레스도 줄어들었다. ‘너 살쪘어, 너 살 빠졌어’라는 말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기 때문이다.








 일기가 내가 알고 있는 감정과 마주하는 시간이라면, 일지는 내가 자각하지 못했던 내 루틴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이 즈음이면 내가 몸이 안 좋을 수 있겠구나, 지금 쯤이며 뭘 준비해야 하는구나' 나만의 시간 개념이 생겼다. 더 많은 일지를 쓸수록 더 많은 시간선이 생성되었다. 이 시간선들은 날실과 씨처럼 얽혀 나의 삶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다.




 지금은 일기보다 일지를 더 많이 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미래의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상상할 때면 기분이 좋다. 나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면, 일지를 써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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