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시험을 때려치우고 마지막 학기 복학을 했다. 앞으로 뭐 먹고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별 수 없지, 사기업에 취업하는 수밖에.' 공무원 시험도 얼마 못가 때려치웠으면서, 나는 또 똑같은 방식으로 내 진로를 정하려고 했다. 그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 거지, 쯧쯧.
진로는 없어도 패기는 있었던 나는 당장 취업 시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입학할 때부터 공무원을 준비했기 때문에 사기업 취직에는 일자무식이었다. '1학년 때부터 준비했는데 그렇게 빨리 관뒀어?'라고 물으신다면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여하튼 이리저리 검색하다 학교에 취업상담센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상담 프로그램이었는데, 코로나로 전화상담만 진행한다고 했다. 후기를 살펴보니 꽤나 평이 좋았다. 생각보다 전문적이고 자세하게 설명해줘서 도움이 되었다나. 등록금을 꼬박꼬박 낸 보람이 있군. 당장 교내 취업상담센터에 상담 예약을 했다.
30분짜리 상담이었는데 스케줄표는 쉬는 시간 없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취업 상담을 받는 사람이 많다니. 취업난이 심각하긴 하구나.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걸 보면 실력이 있긴 있나 보군. 예약 가능한 날 중 가장 빠른 시간으로 상담을 잡았다.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상담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니 아나운서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가진 상담사가 살갑게 인사해왔다.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를 들으니 비웃음을 살 일은 없겠다 싶어 마음이 놓였다.
상담사는 내가 사전에 작성한 스펙과 상담 주제를 빠르게 읽었다. 속전속결, 한국인에게 딱 맞는 방식이었다. 시원시원하니 마음에 드는구먼.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한 상담사는 친절하게 물었다.
“어떤 직무를 생각하고 계세요? 관심 있는 산업군은 있으신가요?”
“어… 무슨무슨 산업이 있는데요?”
나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상담사는 그 많은 직무들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읊어주었다. 그리곤 이중에 관심 가는 분야가 있냐고 다시 물었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평생 다닐지도 모르는 직장을 고르는 순간, 나는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에게 내 진로를 물어보았다.
그런 질문을 한 두 번 받아본 게 아닌지, 그녀는 놀라지 않고 차근차근 답변해주었다.
"교육 관련 산업도 너무 좋죠! 하지만 이왕이면 두세 가지 더 생각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교육산업이 크지 않아서... 산업 연구하시면서 관심 있는 산업에 대해 찾아보세요. 그리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셨으니까, 공기업은 일단 생각해보시고, 혹시 모르니까 사기업도 몇 개 생각해보죠. 보통 경영 전공이 아닌 분들은 영업이나 인사 쪽 직무를 많이 생각하세요. 일단 둘 다 생각해보시고, 둘 중에 더 끌린 쪽을 준비해보세요."
상담사는 거듭 물었다. 관심 있는 산업이 뭐냐고, 관심 있는 직무가 무엇이냐고.
없었다. 하나도 없었다. 산업이라니, 직무라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저는 공무원이 되어서 국가에서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려고 했다구요! 자아 없이 살고 싶었단 말이에요!
당연하지만 상담은 흐지부지 끝났다. 시작부터 멘탈이 바스러진 나와 달리, 상담사는 끝까지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코로나로 취업난이 더 심해져서 다들 힘들어한다, 공시 준비하다 취업 넘어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어려워한다, 전혀 속상해하거나 스스로를 탓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으니 곧 좋은 결과가 있을 거다….
상담사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속사포처럼 위로의 말을 쏟아냈다. 이쯤 되면 취업상담이 아니라 심리상담이라 봐도 무방했다. 나였으면 상담할 생각이 있는 거냐며 당장 끊었을 텐데. 뜻하지 않게 진상고객이 되고 말았다.
전화기를 내려놓고도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한심했다. 아무 생각이 없어서. 하고 싶은 게 없어서. 생각 없이 행동했다가 그렇게 호되게 당해놓고선 나는 또 똑같은 방식으로 선택하려 들었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어쩔 수 없어. 나는 등 떠밀려서 선택한 것뿐이야.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