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HANESI 8월호
집으로 가는 길, 소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화는 시종일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남철을 열심히 변호하였다. 정 많고 살가운 남자다, 결혼도 안 한 사람이 보육원 애들 데려다 호적에 올려놓고 키웠다더라, 지금도 애들 키우면서 봉사 다닌다. 하지만 소라의 표정은 끝끝내 펴지지 않았다.
“왜 하필 그 남잔데! 왜 하필 애가 여섯이나 딸린 남자냐고!”
소라가 소파에 가방을 던지며 소리 질렀다. 미화는 분에 못 이겨 소리 지르는 딸을 붙잡고 애써 앉히며 말했다.
“소라야, 그 사람 진짜 좋은 사람이야.”
“좋겠지! 그러니까 남의 자식 데려다 키우겠지! 그게 문제라고!”
그 남자가 엄말 여자로 만들어 준다며, 근데 이게 뭐야. 여자는커녕 보모 취급하는 거잖아. 차마 내뱉지 못하고 말을 삼켜야 했다. 눈에 힘을 주었지만 붉게 물드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소라야, 엄마 그 사람 정말 사랑해. 아이들도 다 착한 애들이고.”
“아무리 사랑해도 이건 아니야. 엄마 나이가 몇인데, 이제 와서 애를 키운다고? 그것도 넷이나? 나 하나 키우는 것도 힘들었다며. 근데 걔넬 어떻게 키우려고 해!”
소라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우리 엄마가 뭐가 부족해서. 평생 고생하고 이제야 조금 행복해지려는데. 왜 하필 엄마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냔 말이야.
소라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걸어갔다. 그리고 미화를 덥석 끌어안았다.
“엄마, 제발 결혼하지 마. 그 남자 아니어도 남자 많아. 정 아니면 우리 둘이 살자, 응? 우리 지금까지 잘 살아왔잖아.”
미화는 품속에서 제 딸을 떼어내었다. 소라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미화는 단호하게 말했다.
“소라야, 엄만 그 사람이 필요해.”
“그럼 난? 나는 필요하지 않아?”
미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이젠 딸이 아닌 남편이 필요하다고.
소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혼식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애초에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딸자식 때문에 결혼을 무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싫으면 안 할 거라면서.’
그걸 알면서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결혼식 당일, 모두가 하하호호 웃고 있는데 그녀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멀리서 미화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에 체할 것 같아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화장실로 도망갔다. 손을 씻으며 한숨을 쉬는데 누군가 들어와 제 옆에 섰다. 공씨 집안의 장녀, 재영이었다.
공씨 집안사람 중 마음에 드는 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그중 가장 불편한 사람은 단연 재영이었다. 공재영, 공남철의 첫째 딸이자 그녀의 언니-가 될 사람. 아담하고 동글동글한 첫인상과 다르게 재영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녀는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섯 동생들을 진두지휘했다. 그녀는 이 집안의 총사령관이었다.
이번 결혼식도 재영의 작품이었다. 그녀는 바쁜 남철과 미화를 대신해 예식장을 알아보고 청첩장을 만들어 두 사람을 감동시켰다. 미화는 연신 재영을 칭찬하기 바빴지만, 소라는 그녀가 거북했다.
소라도, 재영도, 인사는 없었다. 적막을 먼저 깨뜨린 건 재영이었다.
“애처럼 굴지 마.”
소라가 놀라 고갤 돌리자 재영은 미동 없이 거울을 보며 말했다.
“분위기 망치지 말란 소리야. 눈치껏 행동해.”
그 말을 끝으로 재영은 화장실을 나섰다.
“미친 거 아니야?”
소라는 기가 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화와 소라는 남철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남철은 소라에게 불편하면 나가 살아도 된다고 했지만, 가족은 함께 살아야 정이 생긴다는 미화의 주장에 관철되었다. 공씨 집안사람들을 평생 마주치지 않고 살고 싶었던 소라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나는 절대 저 사람들이랑 같이 못 살아.”
엄마를 붙잡고 애원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저 사람들이 뭐야. 이제 한 가족인데.”
함께 사는 것이 그리도 즐거운지 미화는 시종일관 웃기 바빴다. 오히려 소라의 기분을 살피는 쪽은 남철이었다. 하지만 낯선 아저씨의 호의 따위, 안 받느니만 못했다. 저 사람이 정말 우리 엄마가 맞단 말이야? 너무나도 낯선 엄마의 모습에 소라의 기분이 거북해졌다.
남철의 집은 2층 단독 주택이었다. 1층에는 남철과 어린아이들이 지내고, 2층에는 큰 아이들 방이 있었다고 한다. 재영과 재찬은 취업과 동시에 독립했고, 재희는 학교 기숙사, 고등학생인 재인은 아침에 나가 밤늦게 돌아온단다.
“애들이 없어서 혼자 지내는 거랑 크게 다르진 않을 거야. 지내는 데 불편하면 얘기하고. 알았지?”
남철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남철의 말은 틀렸다. 공씨네 단독주택은 한시도 조용하질 못했다. 재원과 재하는 온종일 집안을 뛰어다녔다. 두 아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새로 생긴 둘째 누나였다. 끊임없이 장난치고 괴롭히는데, 남철과 미화는 애들은 원래 그러기 마련이라며 웃어넘겼다.
평일이 전쟁이라면 주말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본가로 돌아온 사춘기 소년 소녀들은 쉬지 않고 싸웠고, 막내들은 형 누나에게 장난치느라 정신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다그치는 재영의 잔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했나. 소라는 주말마다 약속이니 모임이니 하며 집 밖을 나돌았다.
말 잘 듣고 제 할 일 알아서 하는 소라를 키웠던 미화는, 당연하게도 두 아이 육아를 감당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9인분 식사를 마련하고, 2층 주택을 청소하는 것도 버거워했다. 환갑을 바라보는 그녀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건 소라뿐만이 아니었는지, 남철은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소라는 일이 있다며 불참했지만.
회의 시작 5시간 후, 미화로부터 카톡이 왔다.
[소라야 이제 걱정하지 마. 재영이가 집에 들어와서 엄마 도와준대~ ^^]
소라는 그만 아이스커피를 엎지르고 말았다.
재영과의 동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큰누나를 제일 무서워하는 재원과 재하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지만 조용해진 건 그 둘 뿐만이 아니었다. 재영은 아이들이 버릇없게 구는 것도 싫어했지만,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혼내는 것도 싫어했다. 그 가족에 소라가 포함되지 않음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시작은 재원이었다. 하루 종일 심심했는지 막내 재하의 머리를 툭툭 치는 게 아닌가. 재하는 빼액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재원은 큰 누나 손에 끌려가 방에서 호되게 혼났다. 제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저 혼난 것만 억울한지, 미화의 품에 쪼르르 달려가 엉엉 울어 제끼었다.
여지없는 울음소리에 질린 소라가 팩 쏘아붙였다.
“공재원, 시끄러우니까 그만 울어!”
“소라야, 그만해. 애가 우니까 애지. 너가 이해해.”
미화가 살살 달래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정도껏 해야 이해하지. 매일 울어 제끼는데 시끄러워서 집에 있을 수가 없어.”
“가족이잖아. 서로 양보하고 살아야지.”
가족? 그 말에 눈이 돌아간 소라는 미화를 향해 화살처럼 쏘아붙였다.
“쟤네가 엄마 가족이지, 내 가족이야? 내가 언제까지 엄마 소꿉놀이에 맞춰줘야 해?”
“임소라! 너... 너 어떻게 그렇게 말해!”
재원을 안고 있던 얇은 팔이 파르르 떨렸다. 재영이 미화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재영이 나서려 하자, 미화가 말렸다. 소라는 피식 웃더니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미화는 멍하니 주저앉아 가뿐 숨을 내쉬었다.
“아주머니, 괜찮으세요?”
“나 좀 일으켜 줄래..?”
재영은 미화를 일으켜 안방 침대에 뉘었다. 미화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채 혼자 있고 싶다며 그녀를 내보냈다.
재영은 미화가 안쓰러웠고, 동시에 소라가 너무 얄미웠다. 걔는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지?
재영은 소라의 방에 찾아갔다. 그녀는 방금 있던 말다툼은 기억도 못하는지 침대 위에 누워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재영은 톡 쏘아붙였다.
“아주머니께 말은 너무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소라는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재영을 보곤 다시 고갤 돌렸다. 그 모습에 더 화가 난 재영은 소라의 귀에서 이어폰을 휙 잡아챘다.
“뭐 하는 거야!”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아주머니께 말 함부로 하지 마.”
“신경 꺼. 나랑 엄마 일이니까.”
“딸이면 더 잘해야 하는 거 아니야?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해.”
줄곧 침대에 누워있던 소라가 벌떡 일어났다.
“딸이니까 화내는 거야. 너나 니네 아빤 좋겠지. 우리 엄마가 동생들 봐주니까. 근데 우리 엄만? 자식 다 키우고 이제 편하게 살 나이에 애를 다시 키우는 게 말이 돼? 이 결혼 아니었으면, 우리 엄마 나랑 둘이 여행 다니면서 즐겁고 편하게 살 수 있었어. 이 고생 안 해도 됐다고. 이 집에서 나 말고 우리 엄마 생각할 사람 있어? 없잖아.”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말에 재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의도치 않은 정적이 흘렀다.
“아주머니 고생하시는 거 우리 다 알아.”
재영이 숨을 들이마시며 다급히 말했다. 목에서 개구리 숨 막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거짓말 치지 마. 너 일 덜어서 좋은 거 누가 모를 것 같아? 재인이랑 재희 키운 것도 너라며. 꼬맹이들도 네가 키우게 될까 봐 도망친 거 아니야?”
빈정거리는 말투와 달리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눈에는 눈물이 고이었다. 재영은 딱딱히 굳은 성대 사이로 간신히 신음을 내뱉었다.
“말 함부로 하지 마. 그런 거 아니야.”
“진실은 너만 알겠지.”
소라는 재영을 지나쳐 방을 나섰다. 재영은 문고리를 붙잡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서로 있는 듯 없는 듯 모른 척하며 지냈다. 미화는 둘 사이를 걱정했지만, 남철의 만류에 이러지도 못하고 걱정만 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반목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냉해져, 끝내는 어린아이들마저 눈치를 볼 정도였다.
긴장도 잠시, 서너 달이 지나자 두 사람 사이의 냉전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또 싸우는구나, 가족들은 아무렇지 않게 제 할 일을 했다. 겁을 상실한 재원은 다시 두 누나들을 툭툭 건드리곤 했다. 그러니까 그날은,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분명 그때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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