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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ESI Oct 21. 2022

[초단편소설] 철쭉꽃을 나누며

월간HANESI 10월호 - <수삽석남> 리메이크작

1. 여는 이야기


 아이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 유과를 먹고 있었다. 입가는 유과가루로 범벅이었다. 할머니는 그런 손자를 귀애하며 닦아주었다.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저는 할머니가 해주시는 유과가 두 번째로 좋아요!”


 “그래? 그러면 가장 좋은 건 무엇이니?”


 “음... 할머니가 해주시는 재미있는 이야기요!”


 “그래? 그럼 이 할미가 옛날 이야기 해줄까?”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얼른 듣고 싶다며 좋아했다. 할머니는 손자의 뺨에 입을 맞추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에 최대감 댁에 아주 훤칠하고 준수한 도련님이 살고 있었는데…….”






2. 최항의 이야기


 “안된다! 절대 안 돼! 어디서 감히 그런 계집을 우리 집안에 들려 해! 당장 썩 꺼지거라!”


 고운 그릇이 와장창 깨졌다. 마당에서 종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은 내게서 몸을 돌려 버리셨다. 나는 저린 다리를 붙잡고 방을 나와야 했다. 마당의 종들은 호기심 어린 눈을 애써 숨긴 채 일하는 체 하였다. 다리가 저려, 걸을 수가 없었다. 엉거주춤 발을 내딛자, 멀리서 돌쇠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아이구, 도련님! 쇤네가 모시겠습니다요!”


 말할 기운도 없어, 돌쇠에게 몸을 기댄 채 내 방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어머니의 작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아무도 양보하지 않는 싸움이 몇 달 째 이어지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언쟁은 도대체 언제 쯤 끝나는 걸까. 눈앞이 아득해졌다.




 몇 달 전, 나는 친우의 집에 놀러갔다. 부모님께서는 그가 서자라는 이유로 탐탁지 않게 여기셨지만, 나는 그의 뛰어난 학식과 부드러운 성품이 좋았다. 그는 세도가랍시고 으스대며 남을 무시하는 이들과 달랐다. 나는 그의 식견이 궁금해, 날이면 날마다 문장을 들고 그를 찾아가곤 했다. 그 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잠시 출타했다는 그를 기다리던 중, 나는 그의 누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누이는 차분하지만 강단이 있었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강한 이끌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이틀, 친우가 아닌 그의 누이를 보러가는 날들이 많아졌다. 마주한 날들이 많아질수록 마음도 커져갔다.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부모님을 찾아간 날, 모든 것이 무너졌다. 나는 집 안에 갇힌 채, 매일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피멍이 들다못해 터진 무릎보다 그녀를 볼 수 없는 현실이 더 아팠다.


 “제가 죽는다면, 그렇다면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렵니까?”


 “그래! 차라리 죽는 게 낫겠구나. 가문의 이름에 먹칠할 바에야 죽은 듯이 살아!”


 아버지와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버지께서는 분통해 하시며 가슴을 내리치셨다. 귓가에는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울렸고, 눈을 감으니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아,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쿵쿵쿵.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쿵쿵쿵 쿵쿵쿵. 점점 더 세게, 더 세게, 힘을 실었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져갔다.






3. 여인의 이야기


 벌써 몇 달째 도련님에게서 서신이 오지 않았다. 모두 잘 될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던 모습이 이리도 생생한데,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지 않았나. 분명 좋은 소식을 가져오실거야, 그렇게 나를 위로해야만 했다.




 “아이고, 도련님 오셨습니까!”


 밖에서 오라버니를 맞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라버니 방으로 달려갔다. 오라버니께서는 나를 무심히 바라보시더니, 이내 몸종을 모두 내보내셨다.


 “오라버니, 혹시 도련님께 무슨 소식이 오지 않았나요?”


 오라버니께서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시더니, 내 손을 꼭 붙잡으셨다. 소식은 커녕, 그 집안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다고. 어느 하인 하나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고. 집에 있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다고. 몇 달째 듣는 똑같은 답변이었다. 오라버니께서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 눈빛이, 모든 게 끝났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도련님께서 분명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도련님을 믿어요. 분명, 분명...”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왜 이러지. 분명 도련님께서는 돌아오실 텐데, 왜 자꾸만 눈물이 나는건지. 오라버니께서는 말없이 나를 안아주셨다. 나는 그 속에서 소리없는 울음을 삼켰다.




 유독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낮에 자수를 놓다가 손을 다친 것이 몇 번인지 몰랐다. 퉁퉁 부은 손가락을 매만졌다. 손끝이 아렸다.


 그 때, 어디선가 탁 탁, 소리가 났다. 놀라 고개를 드니, 창문에 인영이 비쳤다. 말 한마디 없어도,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련님이시구나, 도련님께서 오셨구나!  옷을 다 챙겨 입지도 못한 채 마당으로 나갔다. 도련님께서는 처음 만났을 때 보여주셨던 그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해주셨다. 나는 차마 다가갈 수가 없어, 주저앉고 말았다. 도련님께서 내게 다가와 따스이 안아주셨다.




 “도련님... 도련님.... 정말 도련님이시지요...?”


 “하하, 당연히 나지. 그럼 귀신이겠느냐?”


 “모든 것이 꿈만 같습니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요?”


 “꿈이길 바라느냐?”


 “아니요.. 아니요. 차라리 꿈이라면 깨지 않길 바랍니다. 정말...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두 팔에 힘을 주어 나를 안아주셨다. 그 품이 너무나도 따뜻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울면 안되는데, 도련님께서 걱정하실텐데. 아무렇지 않았다고, 정말 괜찮았다고 그렇게 말씀드려야 하는데. 한번 울음이 터지자,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도련님께서는 나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셨다. 그 말이 너무 아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도련님께서는 내 눈물을 닦아주시며, 머리에서 무언갈 빼내셨다. 철쭉가지였다. 진홍빛 철쭉 두 송이가 활짝 피어있었다. 그 향기가 아찔해, 마치 무릉도원에 있는 것만 같았다. 도련님께서는 가지를 부러뜨려 한 송이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다. 이제 함께할 날들만 남았구나.”


 이제 끝났구나. 정말 행복할 일들만 남았구나. 꽃을 받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련님께서는 웃으시며 내 손에 철쭉 가지를 쥐어주셨다. 그리곤 손을 놓지 않으셨다.




 “자, 가잤구나.”


 “어디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허락을 받았으니,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하지 않겠느냐.”


 이 밤중에. 옷도 제대로 입지 않았는데. 혹시 내가 가서 화내시는 건 아닐까.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애써 지워버렸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저 도련님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하고 싶었다.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었다. 그곳에는 사대부의 장손도, 첩의 자식도 있지 않았다. 뿌연 달빛에 숨어,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했다. 하고 또 해도 모자랐다. 같이 있어도 그리워, 몇 번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때마다 도련님께서는 달빛보다도 환하게 웃어주셨다. 풀벌레 소리가 정겨워, 영원히 같이 걷고 싶었다.




 도련님의 집에 이르러, 도련님께서는 예서 기다리라 하시곤 훌쩍 담을 넘어가셨다. 담벼락에 기대어 조심스럽게 철쭉 향을 맡았다. 도련님께서 직접 이것을 따오셨겠지. 그 생각을 하니, 더 사랑스러웠다. 조심조심 꽃잎을 매만지기도 하고, 향을 맡기도 하고, 바라만 봐도 좋았다. 그 향을 즐기다보니, 어느 새 동이 트고 말았다.




 왜 아직도 안 나오시는 걸까. 철쭉을 쥐고 한참을 기다리는데, 한 머슴이 다가와 누구냐고 물었다. 이 댁 도련님과 혼인을 약속한 사이라고, 도련님께서는 언제 나오시는 것이냐 물으니 요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들어가더니, 이내 집사와 함께 나왔다. 집사는 나를 보더니, 이가네 아씨냐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그 아씨였소? 여즉 소식을 못 들었나보네.”


 다시 되물으니, 집사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떼었다.


 “우리 도련님은 팔일 전에 돌아가셨소.”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동안 혼인 문제로 대감마님과 많이 다투었다. 이 일로 근신하게 되어 집 밖을 나갈 수 없었다. 홧병이 도진 것인지 팔일 전 밤 돌연 숨을 거두었다. 그는 횡설수설 그 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가 말을 다 마친 이 후에도, 나는 한참을 말할 수 없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도련님께서 돌아가시다니요! 분명 어젯밤 도련님께서 제게 오셨는걸요. 그 분 손으로 직접 제게 이 철쭉 가지를 주셨습니다.”


 나는 주저앉을 것 같은 몸을 억지로 버티며, 철쭉을 들어 보였다. 그들은 웬 철쭉이냐며 황당해할 뿐이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집사는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했다.




 “오늘이 우리 도련님 장례인데,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오. 원래는 조용히 치르려던 것인데... 다들 정신없으니 조용히 들어갔다 오면 될 것이오.” 


 나는 집사의 도움을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집안 사람들이 상복을 입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들려왔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도련님 댁이었는데,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멀리 관이 보였다. 관을 향해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지독히도 멀었다. 철쭉 향이 바람에 실려왔다. 내 철쭉에서 오는 향인지, 도련님께서 꽂은 그 철쭉인 것인지.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이렇게나 현실적인 꿈이 있을 수 있을까. 어젯밤 그 분의 손길, 눈빛, 미소가 아른거렸다. 불과 몇 시진도 안 지난 일인데, 이렇게나 그리울 수 있는 것일까.


 집사는 하인들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관을 열라고 이야기했다. 여기저기서 반발이 들려왔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윽고 관 뚜껑이 열리자 짙은 철쭉 향이 온 집안을 뒤덮었다. 도련님은, 도련님은... 머리에 철쭉을 꽂고 계셨다.




 어젯밤, 그 모습 그대로였다. 희미한 흙냄새가 배어 나왔다. 옷에는 이슬이 촉촉이 내려앉았고, 신에는 흙이 묻어있었다. 모든 것이 기억 속 그대로인데, 하얗게 질린 얼굴과 차가운 몸이 그가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도련님의 손을 잡았다. 철쭉을 건네주던 그 온기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힘없이 떨어지는 손만 있었다. 울컥, 가슴 속에서 무언가 치솟는데 내뱉을 방도가 없었다. 눈물도 비명도 차마 나오지 못했다.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붙잡은 손에는 힘이 실렸다. 덜덜덜. 몸이 더 심하게 떨렸다. 한기가 밀려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도련님의 몸을 끌어안았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이 이것이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차마 놓을 수 없어, 그 몸을 끌어안고 몇 시진을 울어야만 했다.


 그 순간, 누군가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너무나도 그리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4. 닫는 이야기


 “그렇게 도련님은 깨어나고, 두 사람은 기뻐하며 백년해로를 했다고 한단다.”

 “에이, 거짓말.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요? 할머니가 지어낸 이야기지요?”

 “글쎄? 정 궁금하면 할아버지께 여쭤보렴. 정말이란다.”


 아이는 할머니 품에서 뛰쳐나와 할아버지께 달려갔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창문을 열자, 마당에 철쭉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월간HANESI'는 매월 15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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