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좋은 관계는 어떤 관계냐면..."
랄리에게 나는 첫번째 여자친구였고, 첫사랑이었다.
그 당시 랄리와 나는 둘 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은 내면의 불안에서 나온다. 주로 열등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특별하다고 믿고, 혹은 특별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독특하고 저마다 고유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마음이 강한 사람들은 특별해 지지 않아도 충분히 평화롭고 자연스럽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필요 없이 고유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특별해지기위해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 둘 다 내면이 불안한 채우고 싶은 구멍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각자의 이상형을 상대방에게 투영하며 빠르게 가까워졌다. 나는 랄리를 랄리 자신보다 더 잘 이해했고,랄리는 나를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보다 더 깊게 이해해줬다. 랄리는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는 돈과 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나는 랄리에게 사랑을 상징하는 존재였고,랄리는 나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주는 왕자님 같은 존재였다. 삶은 특별했다.저녁 한 끼에 인당 60만원이 넘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들을 섭렵했고, 회사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고 싶다는 나의 말에, 조지아(그루지야)에 끝도 보이지 않는 땅을 사줄 테니 나의 꿈을 펼쳐보라고 답하기도 했다. 사업에는 눈꼽만치도 관심이 없던 아들이 여자친구의 성화에 가업을 이어받을 기미가 보이니, 랄리네 부모님은 기뻐하시며 발벗고 나서주셨다. 그리고 랄리는 청혼을 했고, 신데렐라는 행복하게 살 일만 남은 듯 했다.
그런데 나는 부처님이 받았다 던 그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붓다는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지만 여전히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휘몰이 장단처럼 몰아치는 신데렐라 스토리에는 뭔가 빠져있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쓰여지지 않을 것 같은 의욕이 없는 상태에 빠졌다. 내가 그토록 원해 마지 않던 회사인 링크드인으로 이직을 했고, “만약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뭘 하고 싶어?”라고 묻는 헌신적인 남자친구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답이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돈을 벌기 위해 어떤 일을 하면 될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즐거운 모험을 해왔던 건데, 갑자기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우리는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개발 도상국에서 사업하는 아이디어 몇 개를 검토해보긴 했지만 나는 이내 그 어떤 것도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비싼 레스토랑도 처음에 갔을 때만큼 신나지 않았고, 여행 갈 때 더 이상 숨은 맛집과 가성비 좋은 숙소를 찾지 않았다.왕자님의 지론에 의하면 가장 비싼 레스토랑이 맛도 좋고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숙소는 안전을 위해 가장 좋은 호텔에서 묵어야 하니까, 또 어떤 곳을 가든 드라이버를고용하면 되니까 여행에 리서치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 지루함과 권태가 나를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까봐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랄리의 단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 청소를 해주는 아주머니가 기가 막히게 집 청소를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집이 깨끗하지 않았다. 단 한번도 옷을 벗어서 제대로 정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나도 방을 개판으로 해 놓는사람이지만, 얘는 정리를 안하는 수준이 달랐다. 결정적으로 강아지 사료가 떨어져서 2주간 사료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지만 2주 동안 매일 까먹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에는 정말 사료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아서 아침에 밥이라도 먹이려고 딱 강아지 먹일 만큼만 밥솥에 남겨 놨는데, 다음 날 아침 그 강아지 먹일 밥을 밤에 랄리가 먹은 것을 발견하고 3년 만에 가장 크게 분노를 했다.
“어떻게 개밥을 먹니, 이 자식아!!!!!!!!!”
김수영 시인의 시에서처럼 나는 조그마한 일에 분개했다.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는 것 마냥…그런데 그 분개는 개밥을 먹은 랄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는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랄리는 나에게 자기가 본 주변의 부자들이 얼마나 불행한 지에 대해서 자주 얘기해주곤 했다. 이대로 가다 간 그 불행이 내 얘기가 될 것만 같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이 신데렐라의 삶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지기로 했다.
그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우리 둘 다 인생을 완성한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가 꿈에서 깼다. 거기에 실연의 아픔까지 더한 랄리는 격하게 방황했다.매일 술 마시며 파티를 하다가 예전 살 빼기로 결심했을 때와 비슷한 레벨의 각성의 시간이 랄리에게 왔다. 운동을 다시 시작해서 몸을 만들기 시작하더니, 정말 진지하게 인생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각종 사상가들의 고전과 신비가들을 섭렵하고 요가를 배우고 명상을 하더니, 요가 선생님이 되려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요가 선생님이 되었다. 그러더니 에르메스 스카프를 하고알렉산더 맥퀸이 디자인한 요가 바지 같은 걸 입고 인도의 구루들이 하고 다니는 커다란 염주 목걸이를 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요새는 깨달음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꽤 즐거워 보인다.
그리고 나에게 왜 우리가 헤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 설명을 해주었다.
“Because we both were a piece of insecured shit.
그건 우리가 둘다 자아가 불안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야. 진정한 사랑은 두 안정적인 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그 자체로 탐구하고 알아가고 상대방을 완전히 포용하는 (fully embrace) 하는 것이거든. 그런데 자아가 불안정한 우리 둘은 서로를 그 자체로보는 것이 아닌 자기가 원하는 이상형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서 그 사람에게 투영하고 그 사람이 아닌 그 이미지, 그 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거지. 그래서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헛소리야(bull shit).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그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는 (embrace) 건데, 그 사람이 뭔지도 모르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그건 사랑이 아니야. 욕망 (lust) 이지.
내가 너에게 했던말 기억나? 나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네가 필요하다 (I need you to be happy)’, 혹은‘네가 나를 완전하게 해 (You complete me)’ 같은 말을 했었어. 언뜻 듣기에 로맨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건 성숙한 사랑이 아니야. 왜냐하면 온전히 스스로일 수 있는 독립적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거든. 그런 의미에서 내가 들었던 가장 로맨틱한 고백은 이거야.
“I don’t need you. However I will be with you because I want to”
(나는 당신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과 함께 할 거에요.)
성숙한 사랑은 한 개인으로서 독립적이고 안정적인 두 사람들 사이에서 가능해. 반면 우리는 서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그 환상을 사랑하고 있었지. 그런데 나는 점점 더 너에게 의존하고 너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needy), 그건 너에게 분명 매력적이지 않게 보였을 거고 너의 환상을 깨기 시작한거지. 그래서 우리는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거야.
이건 연애 및 다양한 관계에서 꽤 흔한 실수야. 많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연애를 하거든. 외로워서, 심심해서 등의 나 혼자로 부족하다는 느낌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만나서 관계로 그 사람이 그 공허한 곳을 메꿔 주기를 기대하는 거지.그게 연애 실패의 레시피야. 먼저 너 혼자로도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하고, 그 후에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도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좋은 관계야. Do you understand, wo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