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전하영
지금보다 시간이 더 지나면 떨칠 수 있을까 싶은 문장들이 있다. 너무 견고해서 영영 멀어지지 않을 것 같은 문장들. 시간은 오직 나에게만 흐르고 그 문장들은 영원을 약속받은 것 같다. 이런 생각은 자주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망각의 축복은 결정적인 순간 작동하지 않는다. 얼굴만 바꿔 번번이 나를 찾아오는 그 문장들 사이에서 호젓해질 수 있을까.
나는 가끔 숲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 감각의 출처를 정확히 알고 있다. 언젠가 본 어느 숲의 사진에서 나의 그 감각이 태어났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마다 정해진 알고리즘처럼 안개가 짙게 내린 숲을 떠올린다. 제주도 유채꽃밭이나 파리의 에펠탑보다 그 숲을 먼저 떠올리는 나 자신을 좋아했다. 아무도 모르는, 모두가 놓치고 있는 파라다이스 하나를 가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난 그 사진을 찍은 작가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나에게서 숲을 빼앗아갔다. 숲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안 사람처럼 어색하게 놀란다. 몇 번을 놀라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숲을 포함해서 내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가끔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떠난다. 떠난 자리에는 적응되지 않는 의심만 남는다. 내가 알고 있는 아름다움은 어딘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나 이대로 괜찮을까? 아름답다는 이유로 지워진 정경을 떠올린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을 다시 살펴본다. 내가 먹은 음식, 읽은 책, 걷던 거리, 오래도록 기억해둔 문장들을 찬찬히 바라본다. 모두 거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안에 비친 내가 또렷하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속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은 관계를 통해 변화한 ‘내’(화자)가 보인다. ‘내’가 변화하는 것만으로 영원이란 단어에 흠집이 가고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어졌을 때 자주 나를 의심했다. 사실 의심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었는데. 스스로를 의심하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취약한 존재로 남게 된다. 허상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파생된 자기혐오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상태. 지금의 내가 바로 그런 상태다.
소설 속 ‘나’와 ‘연수’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나’는 ‘거의 스무 살이나 많은 남자 어른을 한 명의 소년으로 생각하여 끝끝내 매혹당하고 마는, 그런 가냘픈 비극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에게 ‘개수작에 넘어가지 말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연수는 ‘우리는 기록하는 여자가 될 거야. 겪은 것은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거야.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라고 문자를 보내온다. 이것이 나의 다음 스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도무지 사랑할 수가 없는 그들이 거두어간, 아니 이제 더 이상 내가 머물고 싶지 않은 숲에서 벗어나 나의 나무를 심는 것. 더 나은 문장을 보며 자랄 권리가 있는 나 자신과 다음 세대를 위해 기어코 기록해내고 마는 것. 이것이 과거의 나에 대한 결론이자, 미래의 나를 위한 시작이다. 그들이 그랬듯 나의 나무도 홀로 서있지 않을 것이고, 곧 숲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숲에서는 시트러스 향이 나겠지. 숲을 벗어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숲이 될 나무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