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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장 Oct 14. 2019

진짜 여행의 촉감

2007. 12.

서른을 넘겨 처음으로 해외여행이란 걸 떠났다. 신혼여행이었다. 여행사에 의뢰해 세부나 몰디브 같은 휴양지로 떠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내 손으로 티켓을 사고, 숙소를 예약하고, 동선을 짜는 여행을 계획했다.

목적지는 도쿄였다. 결혼 전에 동거를 한 터라 예식은 대외 행사에 불과했다. 그보다는 4박 5일 도쿄여행이 주는 설렘이 더 컸다. 스티브 잡스가 그 유명한 아이폰 프리젠테이션을 처음으로 한 해였다. 사람들은 그리 ‘스마트’하지 않았고, 구글맵은 데스크톱 모니터 상에나 존재했다. 

나는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서 얻은 정보를 가이드북과 대조하며 경로를 짰다. 도쿄를 다녀오기도 전에 도쿄를 알아버린 기분이 들 정도로 나는 이 일을 즐겼다. 

예식을 마친 우리는, 드라마를 끝내고 포상휴가를 떠나는 조연 배우처럼 신이 나서 비행기에 올랐다. 안전벨트의 버클을 채우자 피곤이 몰려왔고, 나는 폐백실에서 받은 밤과 대추의 숫자를 헤아리다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나리타공항에 내려 전차를 타고 도쿄로 넘어갔다. 숙소는 신주쿠로 잡았다. 오크우드[Oakwood]라는 아파트형 레지던스 호텔에서 나흘 밤을 묵기로 했다. 

2007년 12월의 도쿄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가이드북만 있으면 길을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이튿날 첫 일정은 기치조지였다. 우리는 이노카시라 공원 입구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앉아 한국보다 싼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창밖을 오가는 사람을 구경했다.

“갑자기 델리스파이스의 노래를 듣고 싶네.” 내가 말했다.

“뭐?” 아내가 물었다.

“5집 에스프레소 앨범에 있는 거.”

“고백?”

“아니, 기치조지의 검은 고양이.”

우리는 처음 만든 여권의 빠닥빠닥한 종이를 매만지며 “언제 이걸 다 채우지?” 같은 대화를 나눴다. 그것은 진짜 여행의 촉감이었다. 



나는 슬라이드 필름이 든 아날로그 카메라를 들고 고양이 사진을 찍었다. 화요일의 이노카시라 공원에는 고양이가 많았다. 제 그림자의 반영 같은 검은 고양이도 있었다. 

애써 찾은 지브리 미술관이 문을 닫은 걸 빼고는 다 좋았다. 

우리는 어떤 우연과 호의를 기대하며 낯선 도시에 발자국을 남겼다. 계절을 거슬러 가을로 회귀한 기분이었고, 월차를 내고 교외의 공원으로 나들이를 나온 직장인마냥 호수의 정취를 즐겼다. 

기치조지역 앞에서 카메라 뚜껑을 열어 필름 롤을 갈았다. 나는 의욕이 넘쳤다. 도쿄에 왔으니 여기 여기는 꼭 돌아야지 하는 강박을 이기지 못했다. 그것은 첫 여행의 열병과도 같았다. 

오후에는 하라주쿠와 시부야, 오모테산도를 돌고, 저녁에는 신주쿠에 있는 도교도청에 올라 야경을 봤다. 그러고 나서 숙소로 돌아와 시부야의 타워레코드에서 산 라이브 공연 DVD를 잠깐 돌려보고는, 그랜드피아노가 놓인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와인을 마셨다. 

오래 걸었더니 결국 몸에 무리가 왔다. 예식장 앞에서 부슬비를 맞을 때 으스스하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나는 끙끙 앓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

날이 밝았지만, 이마의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신오쿠보의 약국을 찾았다. 한국말로 인사 정도만 하는, 재일교포 3세쯤 되는 약사에게 보디랭귀지로 감기약을 처방받았다. 속 편한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일정을 다그쳤다. 나는 알약을 꿀꺽 삼키고 앞장을 섰다. 

일정대로 시모기타자와로 향했다. 오다큐선과 게이오선이 교차하는 철로 옆에서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고 힘을 냈다. 알약은 효과가 있었다. 내친김에 지유가오카, 나카메구로, 다이칸야마를 돌았고, 에비수로 넘어가 맥주 대신 빨간 순두부찌개를 먹고 다시 살아났다. 

아내는 이자카야에서 맥주를 마시고 싶어했지만,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숙소에 들자마자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오래 들어앉아 있었다.     

     

  


넷째 날은 배를 타고 오다이바로 건너가 쉬엄쉬엄 다녔다. 저녁에는 신주쿠의 이자카야를 다시 찾아 오코노미야키를 안주로 놓고 생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우리는 도쿄의 일상에 적응했고, 커피 맛을 깨치듯 여행의 맛을 알아버렸다. 

이제 도쿄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포스트잇이 붙은 가이드북을 더는 펼치지 않았다. 마지막 날은 여유를 부리며 느지막이 일어나 머리를 감았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짐을 챙겨 호텔을 나섰다. 

“안녕, 또 보자.”

신호등 위에 앉은 큰 까마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까악까악.”

까마귀가 울었다. 

우리는 아침 겸 점심으로 수제 버거를 먹고, 신주쿠의 백화점을 순회하며 가족과 지인에게 돌릴 선물을 샀다. 

나리타공항으로 달리는 전동차에선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았다. 감기는 이제 끝물이었다. 괜히 심통이 나서 트렁크의 빵빵한 배를 발로 툭 찼다. 그런다고 스타벅스 이노카시라 공원점으로 다시 돌아갈 일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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