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008년은 안팎으로 어수선했다. 한 노인의 방화로 숭례문이 활활 타오를 때부터 조짐이 있었다. MB의 임기가 시작됐다. 얼마 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 5위의 투자은행[베어스턴스]이 부도를 맞았고, 여섯 달 뒤에는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했다.
내가 리만 형제를 걱정할 만큼 이 세계가 가깝게 느껴졌다. 광화문 앞은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로 연일 시끄러웠고, 나도 가끔 그 대열에 합류해 청와대로 난 길목에 쌓인 컨테이너 산성의 높이를 재곤 했다.
카라와 소녀시대, 박지성과 <무한도전>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해였다. 버튼을 누르면 달달한 밀크커피를 쪼르르 뽑아내는 거리의 커피자판기처럼 서서 어떻게든 비바람을 견뎌야 했다.
구조조정은 혹독했다. 다이어트로 홀쭉해진 신형 자판기들이 식당 카운터 옆에 한자리를 잡고 헤이즐넛 향이 나는 공짜 커피를 서비스했다. 거리의 자판기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그렇게 사라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스타벅스 본사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8년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하워드 슐츠가 복귀했다. 가계가 힘들면 지갑부터 닫는다. 미국도 다르지 않았다.
맥도날드의 추격이 매서웠다. 사람들은 스벅 대신 2달러짜리 커피를 마시러 맥카페를 드나들었다. 스타벅스의 주가는 연일 내리막길을 걸었다. 결국 600개의 매장이 문을 닫았고, 550명의 직원이 해고됐다.
‘이제 별도 콩도 잊어라.’
2009년 1월, 한국맥도날드가 맥카페를 열면서 내건 카피다. 해피밀 세트에 하나씩 끼워준 슈퍼마리오 피규어만큼이나 인상적인 문구였다. 커피 값은 딱 2000원. 그 값에 아메리카노를 내는 곳은 파리바게트 정도였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배스킨라빈스와 하겐다즈도 커피를 팔았다. 던킨도너츠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엔제리너스, 할리스, 탐앤탐스, 투썸플레이스, 이디야커피…. 프랜차이즈 카페의 간판들이 색색의 실을 꿴 굵은 바늘로 역세권을 시침질했다.
나는 대형마트 지하에서 캡슐 커피 상담을 받았고, 더치커피 기구 앞에서 시간차를 두고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공정무역 커피도 유행했다. 커피콩을 거래하는 이 바닥의 룰은 생각만큼 ‘공정’하지 않았다.
가장 핫한 프랜차이즈 매장은 역시 카페베네였다. 2008년에 창업한 후발 주자지만 성장세가 무서웠다. 할리스 커피의 창업자가 회사를 매각한 후 카페베네에 합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가맹’의 속도는 눈부셨다. 카페베네는 스타 마케팅을 잘했다.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단골 카페로 큰 인기를 끌었고, 창업 2년 만에 스타벅스를 넘어설 정도로 매장 수를 크게 불렸다.
나도 가끔 발을 들였다. 피해가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신맛을 찾기 힘든 묽은 커피는 매장마다 맛이 오락가락했지만, 와플이나 젤라또는 먹을 만했다. 더운 여름엔 푹신한 소파에 기대듯 누워 요거트 스무디를 즐겼다.
프랜차이즈 카페가 다는 아니었다. 그것이 ‘저쪽’의 세계라면 ‘이쪽’의 세계는 또 달랐다. 아이돌 그룹의 팬덤과는 무관하게 인디밴드의 음악을 찾아 듣는 부류가 있었다. 음악의 취향만 놓고 보면, 나는 이쪽에 가까웠다.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의 인기는 여전했고, 언니네이발관이나 델리스파이스도 건재했다.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치킨런>,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의 <악어떼>가 이쪽의 감성을 대변했다.
스타벅스의 저편에 있는, 가장 인디스러운 카페는 합정에 있었다. 당인리발전소로 불리는 서울화력발전소 가는 길에 앤트러사이트[Anthracite, 무연탄]라는 로스터리 카페가 생겨났다. 신발공장을 허물지 않고 외관을 그대로 살려 리모델링했다고 들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증기기관차 같은 프로밧 로스터가 원두를 식히고 있고, 바퀴가 달린 컨베이어벨트 너머에서 바리스타로 보이는 직원들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지붕을 지탱하는 이등변삼각형의 나무 골조, 부수다 만 벽에 부정형으로 크게 뚫린 구멍, 철문을 떼어 만든 테이블 상판…. 시간이 퇴적된 허름함 속에, 뒤축이 닳은 컨버스 운동화 같은 편안함이 묻어났다.
그것은 내가 익히 알던 빈티지와는 다른 차원의 빈티지였다. 한마디로 인더스트리얼했다. 계산된 공간의 여백이 바닥에 떨어진 햇살을 이전의 햇살과는 달리 보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라디오에서 산울림의 <문 좀 열어줘>를 처음 들었을 때와 같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문 좀 열어줘, 내가 있잖아, 여기 있잖아….”
그 목소리는 밖으로 내지른다기보다 안으로 읊조리는 독백에 가까웠다.
나는 화가 났다. 여자에게 퇴짜를 맞은 남자가 자존심으로 버티고 서서 동 트는 새벽을 향해 무너져 내리는, 그 어떤 격정과는 무관했다.
그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반응하는 미간의 찌푸림과도 같았다. 혀의 가장자리로 번지는 단맛과 산미의 조화가 훌륭했다. 미디엄 라이트로 볶은 에티오피아, 케냐, 과테말라 산 원두를 블렌딩한 커피는 ‘공기와 꿈’이란 이름을 달고 있었다.
이제 카페는 카페베네 아니면 무연탄이겠지.
머릿속에 이런 이분법의 잣대가 생겨났고, 이 땅에 커피의 2차 산업혁명이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해[2009년] 겨울에는 산울림소극장 근처에 있던 이리카페가 이웃 동네인 상수로 옮겨왔다. 5년 만에 임대료가 다섯 배나 뛰어, 더는 버틸 수 없었다고 했다.
이제 망원이나 성산, 연남동의 한적한 주택가에도 좋은 카페가 들어설 핑계거리가 생겼다. 한국의 커피혁명을 앞당긴 건 스타벅스가 아니라 젠트리피케이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