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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장 Oct 15. 2019

얼음은 그 각을 녹여 향을 붙든다

2010. 08.

새로 산 원두를 개봉한다. 에스프레소 로스트.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나 라테를 만들 때 쓰는, 가장 기본이 되는 강배전 원두다. 이 원두에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의 조합이면 스벅 커피의 그 맛을 낼 수가 있다. 

강배전. 

단어에서 탄내가 난다. 처음엔 서울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전기기사 이름인 줄 알았다. 아니면 프로권투 신인왕전 타이틀에 도전한 라이트 플라이급 복서거나. 

2010년 봄, 내 손으로 처음 커피콩을 볶았다. 카페 회원이 만든 ‘자작’ 통돌이 로스터를 들여 로브스타 생두로 시험 운전에 들어갔다. 모터를 작동시키면, 구멍이 송송 뚫린 스테인리스 원통이 휴대용 버너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콩을 구웠다. 

열을 받아 부풀어 오른 생두는 두 번 화를 낸다. 1차 파핑 때는 팟, 파밧 소리를 내고, 2차 파핑 때는 지직, 자자작 하며 연기를 피운다. 처음엔 뭐든 어렵고 헷갈린다. 1팝이 2팝 같고, 2팝 때는 은피가 풀풀 날고 연기가 피어올라 어디서 화재 신고가 들어올 것만 같다. 

당황해서 얼른 불을 껐다. 그러니까 내 첫 로스팅의 결과물은 밝은 갈색빛이 도는 약배전 원두였다. 

강배전 원두에 도전한 건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후다. 자글자글 소리와 함께 연기가 자욱해져도 지그시 참다 불을 끈다. 고무가 코팅된 목장갑을 낀 손으로 원두를 채반에 쏟아내고 드라이어의 찬바람으로 한 김 식혀주면 표면이 번드르르한 까만 원두를 얻게 된다. 일명 프렌치 로스팅이다.

   

   

그렇게 볶은 케냐 AA에 미디엄 로스트로 볶은 브라질 원두를 섞어 커피를 내리곤 했다. 섞어 마시니 좋았다. 하지만 프렌치 로스팅으로 달리는 일은 드물었다. 보통은 시티나 풀시티에서 마무리했다. 맛의 스펙트럼이 넓은 중배전 원두가 내 입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2차 파핑이 시작되고 나서 이삼십 초 후에는 불을 끄고 원두를 빼낸다. 이르가체페나 블루마운틴이나 만델링을 구울 때도 내 로스팅 타이밍은 여기에 맞춰져 있다. 

숨구멍이 있는 락앤락 유리병에 콩을 넣어두고 하루나 이틀 뒤에 보면, 정수리에 밴 땀방울처럼 오일이 살짝 묻어난다. 그 원두를 핸드밀로 갈아 드리퍼에 넣고 드립포트의 가느다란 주둥이로 뜨거운 물을 조르르 흘리면, 커피가루가 거품을 빠글빠글 토해내며 빵처럼 부풀었다. 그 시간이 좋았다.

           

   


입맛은 변한다. 나도 처음엔 인스턴트커피로 시작했다. 종이컵에 받아 마시는 자판기 커피도 있지만, 인스턴트커피의 으뜸은 역시 다방 커피였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웨딩 촬영 아르바이트를 했다. 옥편 크기의 비디오테이프가 들어가는 파나소닉 캠코더를 어깨에 메고 예식을 찍었다. 폐백 촬영을 마치고 스튜디오에 돌아가면 사장이 단골 다방에 전화를 넣어 커피를 주문하곤 했다. 

몇 분 뒤에 몸에 딱 붙는 원피스 차림의 ‘레지’ 누나가 스쿠터를 몰고 커피 배달을 왔다. 김양이니 송양이니 하는 누님들이 다리를 탁 꼬고 앉아 빨간 보온병에 든 커피를 따랐다. 나는 뷔페식당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 잔으로 코를 가린 채 누님의 희멀건 다리를 흘끗하다 “커피는 역시 맥심이지”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곤 했다. 

풍선껌을 짝짝 소리 내어 씹을 줄 알던, 그 기세 좋은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다방은 카페에 밀려났다기보다 저절로 사라진 것 같았다. 어디 구멍이 나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보면 바람이 빠져 쪼글쪼글해진 풍선처럼 존재감을 잃었다. 

이대 앞에 스타벅스 1호점이 들어선 게 1999년 7월이다. 아홉수를 넘기가 어렵다는데, 무려 9자가 세 개나 든 해였다. 그해 여름만 해도 스타벅스는 별 볼 일이 없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세계 멸망을 예언한 해지만, 그 세계가 지구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CIH 바이러스로 회사 PC 한 대가 뇌사에 빠진 걸 빼면 이 세계는 이래저래 멀쩡했다. 

라디오에선 시도 때도 없이 리키 마틴의 <리빙 라 비다 로카[Livin’ La Vida Loca]>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우리에겐 리키 마틴의 노래에 나오는 그녀처럼, 앞뒤 안 가리는 광기의 삶을 살 여유가 없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로는 다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미치기 전에 각성해야 했다.

      

  

우리는 커피로 각성했다. 

나는 헤이즐럿 향이 나는 분쇄 원두를 커피메이커에 내려 마시다 콩다방[커피빈], 별다방[스타벅스]을 드나들며 커피 맛을 알았다. 어디를 가나 강배전 원두가 대세였다. 쓰고 달고 진한, 물탄 커피를 벤티 사이즈로 받아놓고 늦은 밤까지 깨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9기압으로 뽑아낸 강배전 원두의 맛에 길들여졌고, 야근에 익숙해졌다.   

           


강배전 원두에는 신맛이 거의 없다. 신맛 뒤에 오는 아로마, 그러니까 과일이나 허브, 견과의 맛과 향을 제대로 즐기려면 약배전이나 중배전으로 볶아야 한다. 이 원두를 갈아 1기압의 중력으로 뜨거운 물을 흘려 종이 필터에 거른 드립 커피가 유행하면서 스페셜티 커피 시장이 생겨났다. 

하지만 강배전 커피가 당길 때가 있다. 빈속에 잠을 깨려고 마시는 아침의 라테,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받아든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비에 젖은 은행잎이 노란 스티커처럼 보도에 들러붙은 늦가을 오후의 카푸치노…. 이런 커피에는 강배전 원두가 어울린다. 

   

스타벅스의 '에스프레소 로스트'

   

각성의 맛.

스벅에서 산 에스프레소 로스트 원두를 갈아 아이스커피를 내린다. 서버에 가득한 얼음 위로 커피가 똑똑 듣는다. 얼음은 그 각[角]을 녹여 향을 붙든다. 둥글둥글 작아져 그 향 위로 떠오른다. 

녹아서 사라지는 건 없다. 저마다 다른 향을 품은 무언가로 융해될 뿐이다. 스피커에서 콜드플레이의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가 흐르는 건 우연이 아니다.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또 한 잔의 커피로 오후의 노곤함을 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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