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04.
“이러다간 평생 유럽 땅을 못 밟고 죽을 거야.”
아내가 말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행 티켓을 카드로 결제했다. 아부다비를 경유하는 에티하드 항공의 티켓이었다.
런던으로 입국해서 파리로 출국하는 이 티켓은 값이 쌌다. 유류세를 합쳐 왕복 티켓 두 장에 백만 원 돈이었다. 나는 박지성의 맨유를 버리고 노엘 갤러거의 맨시티를 응원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에티하드 만세, 만수르 만세.
넉 달 전에 산 티켓이라 준비 기간은 넉넉했다.
여행은 딱 3주로 잡았다. 런던과 파리는 정해졌고, 중간에 어디를 넣을지 고민하다 체코의 수도를 떠올렸다. 프라하는 ‘연인의 도시’이자 ‘카프카의 도시’였다. 나는 보험회사 외판원을 하루아침에 벌레로 만든, 성밖의 도시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이번에도 경로는 내가 짰다. 도쿄 신혼여행의 확장판이었다. 원칙은 두 가지로 정했다. 한곳에 숙소를 정할 것. 숙소를 거점으로 생활하듯 돌아볼 것.
유럽 여행은 처음이라 걱정이었다. 그래서 난이도를 조금씩 높여가는 전략을 짰다. 런던은 한인 민박, 물가가 싼 프라하는 호텔로 가고, 마지막 도시인 파리는 15구에 있는 방 하나짜리 아파트를 빌리기로 했다.
사람들은 아이폰4S의 알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내비게이션은 《전국 도로지도》 책을 서점에서 밀어냈고, 종이에 뭘 찍어내는 잡지사의 사정도 점점 나빠졌다. 나는 ‘객원’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복귀했다. 출근의 자유를 얻은 대가로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은 사라졌다.
아내는 퇴사했다. 달리 한 달을 쉴 방법이 없었다. 한국에서 욜로[You Only Live Once]의 삶은 결단과 각오가 필요했다.
그리고 우린 떠났다. 밤 비행기라 서두르지 않았다. 바퀴가 달린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이사를 가듯 집을 나섰다.
히드로 공항에서 오이스터 카드를 만들고 나자 자신감이 붙었다. 우리는 피카딜리 라인에서 노던 라인으로 갈아타고 오발역에 내려 민박집을 찾아갔다.
교통카드에 왜 굴[Oyster]이라는 말이 붙었을까?
가는 내내 이 사실이 궁금했고, 민박을 하는 누님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굴 껍데기가 단단하잖아. 교통카드의 안전성이나 보안성을 어필하는 은유로 봐야지. 아, 그리고 이런 말이 있어. 더 월드 이즈 유어 오이스터[The world is your oyster].”
“세상은 네 굴이다?”
내 독해 실력은 딱 여기까지였다.
“직역하면 그렇지. 굴 안에 뭐가 있지?”
“굴 안에 굴이 들었죠.”
“먹는 굴 말고, 반짝이면서 동글동글한 거.”
누님이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오케이 사인을 냈다.
“진주요?”
“그래, 진주. 굴 껍데기를 까다 보면 진주를 발견할 수 있지. ‘세상에 못할 건 없다. 뭐든 네 맘대로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한번 부딪쳐봐라.’ 뭐, 그런 뜻이지.”
민박집 주인은 ‘런던언니’로 불렸지만, 나에겐 그냥 누나였다. 간장 양념이 밴 갈비나 두부조림, 오이무침을 접시에 덜어 배를 든든히 채우고 길을 나섰다.
우리는 오이스터 카드를 들고 굴을 캐러 다녔다. 주로 이층버스를 탔다. 정차한 버스에서 바라보는, 4월의 언더그라운드[지하철] 로고가 멋졌다.
버킹엄 궁이나 웨스터민스터 사원 같은 랜드마크는 이정표였고, 산책을 위한 빌미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타워브릿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스타벅스를 발견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한손에 든 문고본 소설을 읽는 남자가 눈에 들었다.
스벅에서 라테를 마시며 생각했다. 내가 찾는 진주란 저런 게 아닐까?
세인트 폴 대성당 앞을 돌아 밀레니엄 다리를 건넜다. 테이트모던에선 데미안 허스트와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데미안 허스트는 해골과 보석을 좋아했고, 루이비통은 쿠사마 야요이의 땡땡이를 좋아했다.
13세기에 문을 열었다는,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인 버로우 마켓이 여기서 가까웠다.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버로우 마켓에는 진짜 굴이 있었다. 껍데기째로 석화를 팔았는데, 싱싱한 굴에 레몬을 뿌리거나 양파를 다져 넣은 미뇨네트 드레싱을 올려 먹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반짝이는 진주는 없었다.
우리는 소시지 몇 줄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러 캔맥주도 샀다. 골목은 손바닥의 손금처럼 훤했고, 런던의 하늘은 오후 내내 맑았다.
“옥스퍼드가 좋아요, 케임브리지가 좋아요?”
런던누나에겐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처럼 익숙한 질문이었다.
“해리 포터 팬이야?”
“해리 포터보다는 헤르미온느를 좋아하죠.”
“헤르미온느? 헐마이어니가 아니라?”
본토 발음은 좀 달랐다. 영국식 억양을 두고 2분간 강의를 들었다.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난 케임브리지에 한 표!”
나는 런더너의 취향을 존중했다. 그래서 케임브리지로 갔다. 교외 여행은 이걸로 끝이었다. 런던 시내만 해도 돌아볼 곳이 차고 넘쳤다. 우리는 프림로즈 힐에 올랐고, 헤이마켓 스트리트의 극장을 찾아 <오페라의 유령>을 봤다. 브릭스톤의 흑인 동네를 버스로 돌았고, 숙소 근처 케닝턴 파크에서 웃통을 벗고 달리는 남자를 구경했다.
그리니치는 예정에 없었다. 어쩌다 무인으로 운행하는 DLR[Docklands Light Railway]이 화제에 올랐다. 그리니치가 종점에서 가까웠다.
“그리니치는 어때요?”
나는 런더너에게 자문을 구했다.
“프림로즈 힐에 가봤지?”
“네.”
“거기랑 비슷해. 언덕이 있지.”
다음날 뱅크역에서 DLR로 갈아타고 그리니치로 향했다.
템즈강 옆에 커티 삭이 전시되어 있었다. 돛을 부풀려 중국의 차를 실어 나르던 범선은 증기선에 밀려 퇴역했다. 《전국 도로지도》 책의 운명도 같았다.
우리는 경도의 기준점이 되는 본초자오선을 넘나들며 그리니치 천문대로 올랐다. 천문대 입구 기둥에 24개의 라틴어 숫자를 단 원형시계가 붙박여 있었다. 워싱턴회의에서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선을 죽 긋고 세계 표준시를 정한 건 1884년의 일이다. 그전에는 나라마다 시간이 달랐다.
천문대를 둘러보고 나와 공원을 걸었다. 벤치 등받이에 기증자의 사연을 담은 얇은 동판이 붙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눈에 들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며
재닛 타이 1954-2007
두 배로 밝게 빛나느라 일찍 꺼져버린 양초.
그녀의 좌우명은 “큰 걱정 없이, 자주 웃으며, 많이 사랑하자”였다.
남편이 생전의 아내를 추억하며 남긴 글이었다. 나는 양초의 비유가 마음에 들었다. 시간을 태우며 스러진다는 건 빛나는 일이니까.
live well, laugh often, love much.
재닛 타이의 좌우명을 카메라에 담는 걸로 런던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디지털카메라에 설정된 날짜가 맞다면, 2012년 4월 7일의 일이다.
우리는 다음날 오전에 짐을 챙겨 스탠스테드 공항으로 향했다. 버스 시간에 맞춰 서두르느라 오이스터 카드를 인포메이션에 반납하지 못했다.
프라하행 비행기가 울컥하며 활주로로 향한다. 이제 손에 든 오이스터 카드는 쓸모가 없어졌다. 그런데도 무슨 무공훈장을 받은 것 같은 뿌듯함에 이 말을 나직이 중얼거려본다.
“더 월드 이즈 유어 오이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