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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Mar 03. 2021

강물에 비치는 산골마을
금강 벼룻길

杏仁의 길 담화_무주 부남에서 서면까지


 하루에 한 번 버스가 들어오는 산골이었다. 버스는 이른 아침 사람들을 태우고 읍내에 나갔다가 저녁밥을 먹을 무렵 다시 사람들을 태우고 돌아오면 차부에서 자곤 했다. 버스 운전수 아저씨는 물론 우리 마을에 살았다.

 네 살 난 동생은 매일같이 차부에 나가 버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산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 온 마을을 덮는 저녁이면, 동생은 혼자서 차부에 나가 동생은 버스를 기다렸다. 덕분에 저녁마다 나는 동생을 찾아 나섰다. 아무리 손을 잡아끌어도 버스를 봐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던 동생. 핑계 삼아 나도 같이 기다렸다가 들어오는 버스를 보았고, 다 늦게 집에 들어가 어머니에게서 핀잔을 듣곤 했다. “너 대체 커서 뭐가 될라고 그려?” 어머니의 호통 소리가 들리면 동생은 멀쩡한 표정으로 운전수가 될 거라고 했다.

 무주군 부남면 대소리. 내 유년의 무대가 된 곳은 금강 줄기가 굽이쳐 흐르는 막다른 산골이었다. 면사무소, 우체국, 국민학교 다 있는 면소재지였지만, 교통편이라야 겨우 하루 한 번 버스 한 대 다니는 ‘꼬라실’이었다.  

 아마, 아버지가 부임한 학교마다 분교 아니면 벽지 학교였다. 어린 시절 하도 이사를 많이 다녀 어디가 고향이라 하기 어색한 내게, 유년의 첫 기억을 심어준 곳이 무주인 이유는 그렇다. 정읍 감곡이 고향인 아버지는, 종손이면서도 고향을 떠나 줄곧 타지로 떠돌았다. 아버지는 전주사범을 나와 열여섯 살 때부터 무려 50년 교편을 잡았지만 고향에서 근무한 건 불과 3년이었으니.      

 부남은 그나마 면소재지라서 큰 동네였다. 나의 첫 기억은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 산골마을에서 시작된다. 덕지리는 무주에서도 해발 1200m를 넘는 산자락에 둘러싸여 경남 거창군과 맞닿은 곳.  오늘날 청정 고랭 지대를 자랑하는 ‘하늘땅 정보화마을’로 탈바꿈했으니 그만큼 산이 높고 깊은 골짜기였다. 여기서 시작된 내 기억의 첫 영상은, 추운 겨울 산모퉁이를 휘몰아치던 매서운 바람, 덕지에서 무풍면 소재지로 이사하던 겨울 끝자락이었다. 

  두터운 오버를 입고 짐보따리를 든 아버지 뒤를 따라서 동생을 업은 어머니와 함께 나는 눈보라 몰아치는 산모퉁이를 걸어갔다. 그때 난 겨우 막 네 살. 어머니는 형이 입던 커다란 오버를 내게 뒤집어씌우고 두툼한 모자로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해서 바람을 막아주었지만, 이놈의 바람은 아주 따갑고 세차게 볼때기를 때렸다. 다리는 아프고, 콧등은 맵고, 어머니 등에 업힌 동생이 어찌나 밉던지! 동생은 겨우 걸음마를 하는 아기였다. 그날 그 바람소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따귀를 때린다.  

 무풍에서 겨우 한 해를 살고 우리 집은 다시 부남으로 이사를 했다. 여기서 국민학교에 두 번이나 입학했고 무려 4년을 살았으니, 부남은 내게 유년의 고향이라 할 만하다. 


 마당이 유독 길게 펼쳐진 집이었다. 사립문을 젖히고 야트막한 돌계단 몇을 올라서면 작은 집이 나를 내려다보았고, 왼쪽으로는 타작마당 뒤편에 헛간과 염소 우리가 남루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우리 집 변소에는 돼지가 없었다. 뒷집 순이네 돼지우리 위에는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변소가 있었다. 순이네 변소에서 똥을 누다가 돼지가 똥꼬를 핥아먹는 바람에 화들짝 놀란 적이 여러 번이었다. 나보다 몸집이 세배는 큰 돼지의 혀는 참 까슬까슬했다. 할머니는 그러다가 돼지가 부랄 따먹는다고 놀리셨지만, 나는 자주 순이네 변소에 가서 똥을 쌌다. 그 이유가 돼지가 똥꼬 핥아주는 재미였는지 순이랑 놀기 위해서였는지는 잘 구분이 안 간다. 순이네 어머니는 내가 똥 누러 오는 걸 늘 반겨주셨다. “돼지 밥 주러 왔어?”하면서 말이다. 

 돼지는 추석날을 앞두고 우리와 헤어졌다. 순이가 엉엉 우는 소리에 뒷집으로 달려가 보니 순이 아버지와 삼촌 둘이서 돼지 멱을 따고 있었다. 나도 엉겁결에 같이 울기는 했지만, 그날 저녁 순이네 마당에서는 윗집 아랫집이 다 모여 삶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순이네 집 위로는 방앗간이 있었고 그 위 언덕에 교회당이 있었다. 디딜방아와 물레방아가 있는 방앗간은 명절 즈음이면 마을 사람들이 다 모으는 집합소였고, 교회당은 크리스마스 때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팥죽을 끓여 먹는 곳이었다.      

 마을 가운데 있는 우물은 다행히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았다. 어머니는 물동이로 우물물을 길어오곤 하셨는데, 비탈진 골목을 한발 한발 오를 때마다 동이에 가득 찬 물이 출렁거리며 어머니 어깨를 적시곤 했다. 어머니는 어린 우리에게 물 길어오는 심부름은 시키지 않았다. 몇 해 전 어느 아이가 혼자서 물을 긷다가 우물에 빠져 죽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랬어도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하나뿐인 이 우물에서 여전히 물을 길어다 먹었다. 

 우물 아래편엔 마을을 가로질러 개울이 흘렀다. 나무다리를 건너면 학교가 있었고 면사무소랑 지서가 있었다. 나무다리 위쪽에선 아주머니들이 쪼그려 앉아 빨래를 했고, 우리 아이들은 아래쪽에서 가재를 잡거나 물장난을 하며 놀았다. 개울가엔 감나무가 몇 그루 있어서 운 좋은 날엔 개울에 떨어진 감을 주워 먹었다. 땡감을 주우면 바위틈에 잘 끼워놓아 우려먹기도 했는데 서로가 걸리는 대로 감을 숨겨놓으니 어느 게 누구 감인지 알 길은 없었다.     

 마을에서 읍내로 나가는 신작로 옆에는 꽤 넓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금강 줄기였다. 강 가운데는 물이 깊어 빠져 죽는다고 했지만, 여름방학 때 집에 온 중학생 형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강물에 뛰어들어 멱을 감았다. 어린 우리는 형들을 뒤따라가 조약돌이나 만지며 놀았고, 이따금 용기를 내어 얕은 물에 들어가 대수리를 잡기도 했다. 형들은 호기롭게 누가 더 깊이 들어갔다 나오나 수영 시합을 하기도 했는데, 그중 우리 둘째형이 언제나 일등을 해서 찐 감자를 두 개씩 따곤 했다. 나는 가장 깊이 헤엄쳐 들어간 둘째형을 지켜보며 가슴을 졸였다. 의기양양한 형은 내게 감자를 내밀며 속삭이곤 했다.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지금은 이 강변으로 마실길이 이어져 온전히 강마을의 풍광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옛길로 다시 태어났다. ‘금강변 마실길’이라고 하는 이 길은, 부남면에서 서면마을까지 모두 19km를 이어놓았다. 

 지금도 여전히 작은 산골인 부남면 대소리 나의 옛 고향마을부터 율소 마을에 이르는 구간은, ‘벼룻길’이라고 해서 조항산(799m) 자락이 금강에 잠기는 절벽길이다. 지금은 천문대가 서 있는 소재지에서 목책 길을 지나 강변 과수원 아래 밭길을 따라가다 보면 굽은 강줄기 옆 깎아지른 절벽을 따라 대롱대롱 붙어 있는 듯 좁고 위태로운 길이 이어진다.  뾰족한 바위 조각들이 밟히는 너덜겅을 달랑달랑 걸어가다 보면, 도대체 길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길은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곤 한다. 옛사람들이 이 길을 벼룻길, 모랭이 길이라 불렀다. 산꾼들이 약초며 산나물을 캐다가 이 길을 따라 금산장, 무주장으로 팔러 다녔다고 했다.

 벼랑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연둣빛 산자락이 비쳐 어른거린다. 푸른 강물 위에 조팝나무 하얀 꽃망울이 넘실거리고 하늘을 날아가는 백로도 그 물에 잠겨서 난다. 길도 험하지만 강물에 비친 풍경 속에 나의 어린 시절도 담겨 있다. _김행인(金杏仁. 시인. 마실길 안내자)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조항산 연둣빛 자락이 비쳐 어른거린다.

조항산 쪽 강변을 따라 좁은 바윗길이 벼룻길이다.

부남면 소재지에서 시작하는 금강변 마실길 초입은 목책 길이다. 벼룻길 각시바위에는 허리를 숙여야 지날 수 있는 작은 굴이 나 있다. 부역 나온 주민들이 정과 망치로 뚫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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