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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Apr 25. 2021

금강(錦江) 천리(千里) 길을 떠나며

杏仁의 길 담화_수분리 뜬봉샘에서

  금강(錦江)은 ‘뜬봉샘’에서 발원해 천리길을 흐른다.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水分리, 금남 호남정맥의 산줄기인 신무산(神舞山 896.8m). ‘신들이 춤 춘다’고 이름 붙여진 이 산 북동 골짜기 중턱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뜬봉샘’이 자리하고 있다.

 작은 옹달샘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물줄기는 장수-진안-무주를 거쳐 충남 금산, 충북 영동-옥천, 다시 충남 신탄진-공주-부여-강경까지 산구비를 끼고돌다 넓은 들을 가로질러 서해로 나간다. 금강하구둑까지 강의 길이는 397.25km, 천리길이다.  골짜기 돌 틈으로 외로이 내려온 물줄기가 작은 지류들과 합세하며 점차 큰 강을 이루고, 완만하게 굽이치며 흐르는 모습이 비단 같다 해서 비단 금(錦)을 쓴다.       

 장장 천리길을 흐르는 동안 여러 물줄기가 합쳐진다. 수분재에서 수분마을을 지나는 수분천은, 북으로 올라가 장수군 천천면 용광리에서 장계천을 만나고,  진안에 이르러 덕유산 아래 구량천과 마이산 아래 진안천을 만나 물줄기가 굵어지며 비로소 강의 위용을 갖춘다. 이어 진안 정자천과 주자천, 무주 남대천을 끌어안고 충북 영동으로 넘어간 후 전라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며 20여 개 지천을 품에 안고 바다로 간다.


 금강은, 전라북도 북부와 충청도의 생명수이자 젖줄로서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물줄기이거니와, 뭇 생명을 잉태한 ‘어미의 강’이라 할 수 있다.  어류 100여 종 이상이 서식하고,  수십만 마리 새들이 날아들며, 수서곤충과 식물군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무주 일대에는 반딧불이와 그 먹이의 서식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고, 강물에는 쏘가리, 꺽지, 어름치, 쉬리, 또 멸종위기 동식물로 지정된 감돌고기가 노닌다. 중ㆍ상류와 하구에는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가창오리와 큰고니를 비롯해 흰뺨검둥오리, 백로 등 수많은 철새와 텃새들이 드나든다.

 철새도래지인 금강 하구둑 주변은, 오리와 기러기류, 도요새, 물떼새류 등 이 해마다 8만 마리 이상 찾아든다. 지구 상에 4천 마리 정도가 생존해 있다고 추정되는 멸종위기종 검은머리물떼새(천연기념물 326호)를 비롯해 검은머리갈매기, 고니 등 세계적 희귀종 또는 멸종위기에 있는 조류가 금강에서 겨울을 난다.

 동시에 금강은, 옛 백제 사람들의 애환과 역사, 문화를 껴안아 흐른다. 곡창지대인 강 유역 분지와 평야부에, 해상교통과 농업 생산으로 번성했던 옛 상업도시와 고도(古都)가 자리하고 있다. 철도와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이전 강과 바다가 만나는 뱃길은 주요한 산업도로 기능을 했다.      

 옛 시절 금강은 ‘반역의 강’으로도 불리었다. 뜬봉샘에서 충북 부강에 이르는 동안 줄곧 남에서 북으로 역류하다 충남 연기에 이르러서야 남서로 흐름을 바꾸기 때문이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연상시킨다고 하는 금강 주변의 산세와 지세를 들어,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저항지인 이 일대의 사람들을 경계했다고 전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역사가 금강에게 매긴 한 단면이다.


 금강 발원지 뜬봉샘이 있는 장수군 장수읍 수분(水分) 마을은, 이름 그대로 물이 갈라지는 곳이고, 장수(長水)의 지명은, 산이 높고 물이 길다는(山高水長) 뜻이다. 수분령 서쪽 오백 미터 거리 원수분 마을 뒷산 신무산 기슭에 뜬봉샘이 있다. 수분마을은 금강의 발원지이면서 물줄기가 나뉘어 금강은 서해로 섬진강은 남해로 흐른다. 수분마을 김세호 씨 댁 지붕에 떨어지는 빗물이 남쪽으로 떨어지면 섬진강, 북쪽으로 떨어지면 금강으로 흘러내린다고 했었다.

  뜬봉샘 생태공원을 거쳐 원수분 마을 뒷산을 오른다.  원수분 마을은 집집마다 호두나무가 있고 신무산 남쪽 자락에 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어 고향같이 포근하다. 마을 입구에 '물뿌랭이 마을'이라 한다는 안내판이 있다. 1860년 어느 경상도 여자가 시집을 가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물뿌리 마을로 간다고 했다 한다. 예전부터 물의 근원이므로 뿌리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뜬봉샘 안내판은, 태조 이성계에 얽힌 이야기로 ‘뜬봉’의 유래를 소개한다. 조선 건국 이전 신무산 중턱에 신단을 쌓고 백일기도를 올리던 이성계가 ‘새 나라를 열라’는 계시와 함께 떠오른 무지개 위로 날아가는 봉황을 본 뒤 그 자리를 찾으니 풀숲에 덮인 옹달샘이 있었고, 봉황이 떠오른 곳이라 해서 ‘뜬봉’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다른 전설도 전해진다.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刊)은, 이곳이 ‘장군 대좌혈(將軍大坐穴)’의 명당으로 역적이 날까 두려워 숯불을 놓고 불을 질러 뜸을 떴던 자리라 해서 ‘뜸봉샘’으로 불렸다고 적었다. 고을의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이 산 곳곳에 뜸을 뜨고 봉화불을 올린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수분 마을 안쪽 붉은색 함석 슬레이트 지붕 건물에 하얀 십자가가 선명하게 눈에 띈다. 한국 근대문화유산에 등재된 천주교 수분 공소다. 수분 공소는, 장수와 장계로 성당을 내는 산파 역할을 했던 곳인 만큼 한국 천주교회사에 의미 있는 공간이라 한다. 1850년대 전라도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근거지 중 하나였고, 병인박해 이전에 이춘경이라는 신자가 마을에 살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피신한 천주교 신자들이 수분마을로 모여들어 교우촌이 형성되고 북쪽 골짜기인 막골과 남쪽 골짜기인 운학동에도 교우들이 피신해 살았다고 한다. 숨어 지내던 김대건 신부도 이 마을에 들러갔고, 가까운 계북(溪北)면 정지터골 토굴에 자리 잡고 선교활동을 했던 리델 주교의 후임 블랑 주교도 들러갔다고 한다.  1913년 공소를 지을 때에는 신자들이 십리 밖에서 나무를 져 날라 왔고, 한때 신자가 1,300명에 이르러 1927년 성당으로 승격됐으나, 다시 수분마을 인구가 줄고 장수읍이 커지면서 다시 공소로 남겨졌다.

수분마을에 자리한 천주교 수분 공소. 붉은색 함석지붕에 하얀 십자가가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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